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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 '살풀이춤' 보유자 정명숙 선생 별세, 향년 89세2019년 국가무형유산(국가무형문화재) '살풀이춤' 보유자로 인정된 정명숙(丁明淑) 사단법인 전통춤연구보존회 이사장이 2일 오후 3시40분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전했다. 향년 89세. 1935년 11월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북여고 졸업 후 상경, 김진걸(1926∼2007) 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등에게서 여러 장르의 춤을 배웠다. 1982년부터 서울 강북구 삼양동 자택에서 고려민속무용연구원을 운영했고, 1991년 종로3가로 옮겨 제자를 가르쳤다. 1983년부터는 해외 순회공연을 다녔다. 고(故) 이매방 보유자와 인연을 맺어 오랫동안 '살풀이춤' 전승활동에 힘썼고, 1991년 이수자, 1993년 보유자 후보(현 전승교육사)로 선정되었다. 개인발표회를 비롯하여 국내외 다양한 공연활동을 통해 전통무용 예술가로서 널리 이름을 알렸으며, 고려대학교 체육교육대학원을 수료하고 키르키즈스탄 비비사라 베쉴라리바 국립예술대학에서 명예예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등 학문적 역량도 상당하였다. 한평생 살풀이춤의 전승과 발전에 헌신한 열정과 활동을 통해 2019년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당시 84세 나이로 최고령 보유자가 된 고인은 "춤이 좋아서 외길 인생을 간 지 70년이 됐다"며 "향기가 남는 춤꾼으로 영원히 남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제자 박진희씨는 "(고인은) 늘 '춤에서 인생이 나온다'거나 '기량도 중요하지만 인성이 중요하다'고 하셨다"며 "돌아가시기 전에는 평소 예쁜 걸 좋아하시는 분답게 '끝까지 아름답게 죽고 싶다'고 하셨다"고 전했다. 살풀이춤 보유자가 새로 나온건 29년 만이었다. '살풀이춤은 즉흥성이 강하고, 고도의 기량이 요구되는 춤이다. ‘살풀이춤’은 하얀 수건을 들고 살풀이 가락에 맞춰 슬픔을 환희로 승화시키는 인간의 감정을 아름다운 춤사위로 표현하는 춤이다. 한 해의 나쁜 운을 풀기 위해 무당이 굿판에서 추었던 즉흥적인 춤에서 유래하였으나, 점차 예술적인 형태를 갖추어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춤으로 정착되었다. 고인은 평생 독신이었다. 유족은 동생 정경자씨와 조카 신승환·신우성·정상영씨 등이 있다. 빈소는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 303호실 (02-923-4442)(3일 오전 9시부터 조문 가능), 영결식(사단법인 한국전통춤협회 주최) 4일 오후 6시, 발인 5일 오전 7시, 장지 양수리 갑산공원묘원. 070-7816-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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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회 전국신인무용경연대회 대상에 차지혁대한무용협회는 제61회 전국신인무용경연대회 대상 및 한영숙상 수상자로 현대무용 '메모리 오브 센스'를 선보인 차지혁(한국예술종합학교)을 선정했다고 8일 밝혔다. 신인 무용인들의 등용문으로 통하는 전국신인무용경연대회는 한국전통무용, 한국전통명작무, 한국창작무용, 현대무용, 발레 부문으로 나눠 진행된다. 올해는 총 224명이 참가했으며, 예선을 거쳐 지난 5일 영등포아트홀에서 96명이 본선을 치렀다. 차지혁은 각 부문 금상 수상자 중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둬 올해 대회 최고의 무용수로 선정됐다. 올해는 발레연구학회 후원으로 발레 부문에 홍정희상이 신설됐으며, '에스메랄다'를 선보인 김은서(경희대)가 수상자로 뽑혔다. 한국창작무용 부문에서 최고 점수를 받은 이에게 수여되는 송범상은 양기성(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전통명작무 부문 최고 득점자에게 주어지는 김진걸상은 윤주현(경희대)에게 돌아갔다. 부문별 금상 수상자는 아래와 같다. ▲ 현대무용 여자부문 임재령(경희대) ▲ 현대무용 남자부문 차지혁(한국예술종합학교) ▲ 발레 여자부문 김은서(경희대) ▲ 발레 남자부문 이수현(서울발레씨어터) ▲ 한국전통명작무 부문 윤주현(경희대) ▲ 한국전통무용 여자부문 김채린(장인숙 희원무용단) ▲ 한국전통무용 남자부문 윤형서(한국예술종합학교) ▲ 한국창작무용 여자부문 이선영(경희대) ▲ 한국창작무용 남자부문 양기성(한국예술종합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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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세실풍류, 51명이 근현대춤 100년사 선보인다국립정동극장이 한국 창작춤을 이끌어온 근·현대 춤꾼들의 100년 여정이 담긴 작품을 선보인다. 한국 창작춤을 이끌어온 춤꾼 51명의 무대가 이번 달 매주 화·목요일 여덟 차례 공연이 이뤄진다. 배구자·최승희·조택원 등 신무용 시기 춤부터 2000년대 이후 컨템퍼러리 댄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화해 온 우리 전통춤에서 신무용의 예술성을 감상할 수 있다. 근대 신무용이 등장한 1920년대부터 전후 무용학원 시대, 국립무용단 창단기, 1970년대 춤의 새로운 도화선이 됐던 한국창작춤, 현재의 컨템퍼러리 작품들까지 100년을 관통하는 우리 춤의 변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근대 신무용기는 시대적 흐름과 함께 새로운 개념으로 한국창작춤의 태동을 알리는 시기였다. 4일과 9일에는 1920년대 신무용을 조명한다. 지난 4일 1920년대 서양 문화의 도입과 함께 우리 민족의 고유 정서를 바탕으로 새롭게 탄생했던 신무용이 선보였다. 배구자·최승희·조택원의 작품을 김선정·노해진·안나경·최신아·국수호·김형남·김호은이 무대에 올랐다. 신민요 ‘아리랑’을 우리나라 최초로 무대화하며 신무용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배구자와 신무용의 성행에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함으로써 신무용 시대를 연 최고의 무용가 최승희, 조택원의 작품을 오늘날 새롭게 재현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었다. 국악평론가 윤중강의 맛깔스런 해설로 흥겹게 진행되었다. 1920년대 신무용 선구자 '배구자의 '에여라 노아라' 민요춤을 김선정이 재현했다. 객석은 첫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1920년대 뮤직박스에 이끌려 시간이동을 하게 된다. 막이 오르자 어두운 무대 배경에는 서서히 배구자의 춤자태를 보여주는 사진이 나오고, 밝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무용가는 잠시 그대로 배구자의 몸짓을 흉내 내고 정지 되어 서 있다가 춤을 시작한다. 지금으로부터 백년전 불려졌던 민요는 오늘날 불려지면서 지금 시대에서 느껴지는 정서보다는 다르게 젖어들었다. 소박하고 정겨웠다. 일상복을 입는 한복에 앞치마를 두른 이웃집 처녀가 집안 일하면서 노래를 부르다가 제 멋에 못이겨서 흥겹게 춤을 추는 모습이다. 첫 무대는 많은 박수를 받으면서 다음 무대가 더욱 기대되었다. 다음은 '배구자의 타령춤'을 노해진이 재현했다. 무대 배경에 나온 배구자가 입은 무용복과 똑같이 재단을 해서 만든 옷인데, 배구자는 색동무늬가 박힌 옷을 입었고, 무용가는 화려하고 커다란 꽃이 그린 무늬가 박힌 무용복을 입었다. 노해진은 배구자의 정서와 감성을 표현하려는 집중력 있는 연기력과 호흡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물 흐르듯이 시간이 흘렀다. 일단 타령조로 불린 무용곡이 신났다. 따라서 부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타령조라고 붙였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구자는 1936년 직접 부른 도라지타령, 천안삼거리 곡이 담긴 음반을 낸 가무악에 능한 예술가다. 이 두곡을 엮고, 배구자의 영상, 사진, 기사자료를 참조하여 만든 신민요춤이라고 소개가 되었다. 무용을 보여주는 동안 무대에서 나오는 영상에는 미국 자택에서 인터뷰하는 100세를 맞이하는 배구자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1928년 발표한 아리랑은 조선인이 만든 최초의 신무용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만큼 아리랑이 그 당시 최고의 유행가라는 것이 입증된다. 그만큼 배구자는 시대의 트랜드를 읽을 줄 아는 한국 근현대무용의 선구자인 것이다. 일제강점기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유럽, 남미, 미국 등 15개국 순회공연을 하면서 세계적 무용가 반열에 오른 최승희의 대표 작품 '초립동'과 '검무 격'은 안나경 무용가, 쟁강춤은 북한출신 최신아 무용가가 재현했다. 최승희는 현대무용 계열의 창작춤은 주목받지 못하다가 1934년 일본에서 조선풍 소재 창작춤을 발표하면서 대성공을 이루고 대스타로 부상하게 된다. 1937년 동경에서 초연된 '초립동' 춤을 1995년 김백봉이 새로이 안무한 작품을 안나경이 무대에 올렸다. 신명나는 밀양아리랑 선율에 맞추어서 빠른 템포로 추었는데, 허공에 들었다 났다하는 발동작을 앙징맞게 연출하며 누나같은 색시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천진난만한 어린 신랑의 모습을 자연스레 연출하면서 큰 박수를 받았다. 최승희의 상장적인 춤이라고 하는 쟁강춤은 북한무용을 대표하는 무용이다. 최승희의 쟁강춤은 무희춤이라고 불리는데, 최승희의 '무희' 춤을 바탕으로 여러 명의 무용수가 나오는 군무이기 때문이다. 쟁강춤은 손목에 '쟁강, 쟁강' 소리를 내는 쇠팔찌를 걸고 흥겨운 리듬을 울리면서 추는 춤이며, 본 작품은 지난날의 '쟁강춤'을 현대적 미감에 맞게 재형상하여 훌륭한 무대 예술 작품으로 완성한 특색있는 춤이다. 북한출신 최신아 무용가가 최승희 직계 제자답게 시원시원하게 보여 주었다. 1987년 파바다가극단에서 최승희 직계제자 김응범 선생에게서 쟁강춤을 배웠다. 남한 지역 전통 춤사위는 대개 느린 템포로 정중동을 표현한다. 여기에 북한 춤사위는 러시아 예술의 영향으로 남한보다 훨씬 빠른 템포를 유지한다. 한 시간이 넘는 무대를 남한춤만 채우기보다는 북한춤도 함께 보여주면 음악적 바란스가 안정적이라고 본다. 무대는 지루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특히 국외동포들에게 전통 춤사위만 보여준다면 러브콜이 없는 무대로 기억될 것이다. 2019년 러시아 사할린아리랑제 무대에서 최신아가 선보인 쟁강춤으로 러시아 동포사회와 시민들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오늘 무대에서도 연기력이 뛰어난 최신아는 쟁강춤을 완벽하게 선사했다. 그 댓가로 우뢰와 같은 관객의 박수를 선물로 받았다. 검무 격(格)은 검무는 신라 시대 때부터 만들어져 내려오던 검무를 모티브로 1934년 창작된 최승희의 대표 작품 중의 하나이다. 검무가 원형을 잃어버리고 검의 움직임만을 주로 담은 섬약한 모습 무사(武士)의 검무, 즉 검술의 무도정신을 이어받은 움직임들로 창작했다. 작품 '검무_격格'은 김백봉이 최승희의 원작 '검무'를 1995년 격(格)이라는 부제로 안무 발표한 작품이다. 무예를 닦는 무인의 기백과 그 속에 깃든 기혼(氣魂)의 이상경(理想境)을 하나의 격의 경지로 표현했다. 안나경은 최승희의 춤사위를 체화하고 자신있게 보여주었다. 신라를 상징하는 금관악기와 금색이 도는 금으로 만든 신발 등 화려한 금색 치장은 신라에서 숭상하는 검을 숭상하는 검도정신을 춤으로 형상화했다. '조택원의 가사호접(袈娑胡蝶)'을 국수호가 재현했다. 전문가에 의하면 그 시설 조택원의 춤사위를 잘 표현했다라고 평했다. 원로 무용수답게 완숙한 선과 호흡을 선사하여 기장 큰 박수를 받았다. 조택원의 가사호접(袈裟胡蝶)은 조택원이 1935년 경성공회당에서 가진 제2회 신작무용발표회에서 초연한 작품이다. 초연 당시의 제목은 '승무(僧舞)의 인상(印象)'이었으나 이후 시인 정지용에 의해 '가사호접'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한국에서 창작춤을 위해 처음으로 음악을 작곡한 작품이었고, 작곡은 김준영이 맡았다. 작품은 속세를 동경한 승려가 심산유곡을 버리고 새벽녘에 사바세계로 내려오며 시작된다. 가사를 벗어 던지고 환희와 광란의 춤을 추던 승려는 지쳐 쓰러져 생각한다. 불교에 의지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며 다시 가사를 집어 들고 산에 가려 해보나 이미 파계승이 되어 돌아갈 수 없다. 앞으로도,뒤로도 갈 수 없는 승려는 가사를 집어 던지고 다시 한번 생각한다. 가사호점은 승려의 파계와 귀의 과정에서 겪는 고뇌와 희열을 한국의 춤사위로 표현하고 있다. 조택원의 만종'을 김형남·김호은이 재현했다. 만종이라는 명화를 재해석하여, 신선한 스토리를 상상하게 하고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춤사위가 아름다웠다. 남과 여의 호흡이 잘 어울어져서 펼쳐지는 큰 원 속에서 마치 두마리 나비가 사랑을 찾아서 희롱하는 모습은 객석을 행복하게 해주었다. 조택원의 만종은 19세기를 풍미한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 '만종'과 프레데리크 쇼팽의 '야상곡'에 영감을 얻어 창작된 2인무다. 조택원의 집 2층에 살고 있던 음악가 김생려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 엘만이 피아노곡을 바이올린곡으로 편곡한 쇼팽의 '야상곡'을 밤낮으로 연습하고 있었다. 하루에 수십 번씩 연주를 듣던 조택원은 마침 방에 걸려있던 밀레의 그림 '만종'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 만종은 1935년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조택원의 제2회 신작무용발표회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경건한 기도를 드리는 부부가 '야상곡'에 맞춰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비길 데 없는 평화와 고요, 비현세적인 경건함과 헤아릴 수 없는 자연의 신비가 조택원의 머리에서 춤을 추었고, 상상을 실현하여 작품 '만종'이 창작되었다. 한편 9일에는 신무용 2세대 김진걸·김백봉·최현·황무봉·최희선·송범의 작품을 정민근·안귀호·정혜진·김혜윤·윤미라·손병우·김장우·최영숙이 선보인다.11·16·18·23일에는 다양한 표현기법으로 새로운 한국춤을 모색했던 1970년대 이후의 한국 창작춤을 만나볼 수 있다. 무용 전문 조직체와 교육기관이 설립되며 더욱 다채롭고 창조적인 춤이 등장했던 시기다. 당대를 대표하는 김매자·배정혜·국수호·문일지의 작품 등 창작춤 24편이 4회에 걸쳐 공연된다. 25·30일에는 한국 춤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은 컨템퍼러리 춤꾼들의 작품 12편이 무대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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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세실풍류, 근현대춤 100년의 여정국립정동극장(대표이사 정성숙)이 '세실풍류 : 법고창신, 근현대춤 100년의 여정'을 개최한다. 4월 한 달간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총 8회에 걸쳐 열리는 이번 공연은 한국 창작춤을 이끌어 온 근현대 춤꾼들의 여정을 50개 작품으로 선보인다. 이번 공연의 주제는 ‘법고창신(法古創新)’으로 옛것을 바탕으로 늘 새로움을 창조해온 근현대춤 100년의 여정을 다룬다. 1920년대 근대 신무용의 등장부터 전후 무용학원 시대와 국립무용단 창단기의 춤 그리고 1970년대 춤의 새로운 도화선이 되었던 한국창작춤을 거쳐 현재의 컨템퍼러리 작품들까지 근현대 100년을 관통하는 우리춤의 변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4일(목)과 9일(화)에는 1920년대 서양 문화의 도입과 함께 우리 민족의 고유 정서를 바탕으로 새롭게 탄생했던 신무용을 다룬다. 근대 신무용기는 시대적 흐름과 함께 새로운 개념으로 한국창작춤의 태동을 알리는 시기였다. 4일에는 신민요 ‘아리랑’을 우리나라 최초로 무대화하며 신무용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배구자와 신무용의 시대를 연 최고의 무용가 최승희, 조택원의 작품을 김선정, 노해진, 안나경, 최신아, 국수호, 김형남·김호은이 무대에 올린다. 9일에는 한국전쟁 후 신무용 2세대 김진걸, 김백봉, 최현, 황무봉, 최희선, 송범의 작품을 정민근, 안귀호, 정혜진, 김혜윤, 윤미라, 손병우, 김장우·최영숙이 선보인다. 11·16·18·23일에는 다양한 표현기법으로 새로운 한국춤을 모색했던 1970년대 이후의 한국 창작춤을 만나볼 수 있다. 무용 전문 조직체와 교육기관이 설립되며 더욱 다채롭고 창조적인 춤이 등장했던 시기다. 당대를 대표하는 김매자·배정혜·국수호·문일지의 작품 등 창작춤 24편이 4회에 걸쳐 공연된다. 25·30일에는 한국 춤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은 컨템퍼러리 춤꾼들의 작품 12편이 무대에 오른다. 국립정동극장 정성숙 대표이사는 "근현대의 급변하던 격동의 세월 속에서 시대에 따라 우리만의 독창적인 색깔로 새로움을 추구했던 한국 창작춤의 흐름을 담아낼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귀한 자리에 춤을 사랑하시는 분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라고 공연을 올리는 소감을 전했다. 회차별 프로그램 공연일 테마 출연자 작품명 4/4(목) <조선의 마음에서 태어난 춤> 1920년대 이후: 신무용의 등장 김선정 배구자의 에여라 노아라 노해진 배구자의 타령춤 안나경 최승희의 초립동 최승희의 검무_격(格) 최신아 최승희의 쟁강춤 국수호 조택원의 가사호접(袈娑胡蝶) 김형남·김호은 조택원의 만종 4/9(화) <꺼지지 않는 창작의 불씨> 1950년대 이후: 신무용 2세대 정민근 김진걸의 내 마음의 흐름 안귀호 김백봉의 청명심수 정혜진 최현의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 김혜윤 황무봉의 연연(連緣) 윤미라 최희선의 달구벌입춤(達句伐立舞) 손병우 송범의 참회 김장우·최영숙 송범의 은하수 4/11(목) <춤의 새로운 도화선> 1970년대 이후: 한국창작춤의 등장 최지연 김매자의 광(Shining Light) 김성의 김매자의 日舞 <하늘의 눈(目)> 이고운 배정혜의 유리도시 김세령 배정혜의 떠도는 혼 계현순 문일지의 멀리 있는 무덤 이윤경 국수호의 비천(飛天) 4/16(화) <타오르는 창작의 혼> 1970년대 이후: 한국창작춤 2 윤덕경 해를 마시다 정은혜 언제나... 그리고, 그러나 백현순 다시 꽃밭으로 이애현 봄날의 기억 태혜신 사르다 남수정 락무(樂舞) 4/18(목) <미래를 밝히는 정열의 횃불> 1970년대 이후: 한국창작춤 3 손인영 유유유(有.柳.流) 박시종 달빛아래, 농(弄) 김수현 홀연춘풍 만목개화(忽然春風 蔓木開花) 윤명화 메타포 3 홍경희 흰 바람 소리 윤성주 담청 4/23(화) <거침없는 창작의 불길> 2000년대 이후: 한국창작춤 4 이정윤 백송(白松) 황재섭 금시(琴詩) 조재혁 현 一. 안덕기 허튼가락춤 김평호 정글-봉우리 김용철 붉디 붉은 4/25(목) <새로 피어나는 춤> 2010년대 이후: 컨템퍼러리 한국춤 이이슬 HOME(solo ver) 황서영 버티- 송윤주 MUSE 이지현 한몫 보연 율곡(汩曲) 유선후 우아한 우주(Elegant Universe) 4/30(화) <청춘의 춤, 작열하는 푸른 불꽃> 2010년대 이후: 컨템퍼러리 한국춤 조인호 BIRTH 박기환 香그이 김주빈 새다림 SeDarim 박철순 동화(홀로 서기) 기무간 비로소:걷는 사람 정명훈 흐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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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 창작춤 100년사 담은 50개 작품 선보인다한국 창작춤을 이끌어 온 근현대 춤꾼들의 여정을 50개 작품으로 선보인다. 국립정동극장이 '세실풍류 : 법고창신, 근현대춤 100년의 여정'을 개최한다. 4월 한 달간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총 8회에 걸쳐 열리는 이번 공연의 주제는 ‘법고창신(法古創新)’으로 옛것을 바탕으로 늘 새로움을 창조해온 근현대춤 100년의 여정을 다룬다. 1920년대 근대 신무용의 등장부터 전후 무용학원 시대와 국립무용단 창단기의 춤 그리고 1970년대 춤의 새로운 도화선이 되었던 한국창작춤을 거쳐 현재의 컨템퍼러리 작품들까지 근현대 100년을 관통하는 우리춤의 변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주 4일(목)과 9일(화)에는 1920년대 서양 문화의 도입과 함께 우리 민족의 고유 정서를 바탕으로 새롭게 탄생했던 신무용을 다룬다. 근대 신무용기는 시대적 흐름과 함께 새로운 개념으로 한국창작춤의 태동을 알리는 시기였다. 신민요 ‘아리랑’을 우리나라 최초로 무대화하며 신무용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배구자와 신무용의 성행에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함으로써 신무용 시대를 연 최고의 무용가 최승희, 조택원의 작품을 김선정, 노해진, 안나경, 최신아, 국수호, 김형남·김호은이 무대에 올린다. 그 뒤를 이어 한국전쟁 후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위 창작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고 신무용의 외형적 변화를 이뤄내며 한국 무용계의 단단한 토대를 다진 신무용 2세대 김진걸, 김백봉, 최현, 황무봉, 최희선, 송범의 작품을 정민근, 안귀호, 정혜진, 김혜윤, 윤미라, 손병우, 김장우·최영숙이 선보인다. 둘째 주와 셋째 주에는 다양한 표현기법으로 새로운 한국춤을 모색했던 1970년대 이후의 한국창작춤을 만나볼 수 있다. 여러 국제 행사를 통해 해외 무용 단체와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무용 전문 조직체와 교육기관이 설립되며 더욱 다채롭고 창조적인 춤이 등장한 시기로, 당대를 대표하는 안무가 김매자, 배정혜, 국수호, 문일지의 작품이 무대 위 펼쳐진다. 그들의 뒤를 이어 한국창작춤을 이끌어온 교육자, 시·도립 무용단의 수장, 탁월한 안무력의 남성춤꾼들의 작품 등 한국 창작춤 작품 24편이 4회차에 걸쳐 공연된다. 마무리를 장식할 25일과 30일에는 2010년대 이후 장르 간 경계를 넘나들며 한국 춤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고 가장 활발하게 동시대의 창작 동향을 이끌고 있는 컨템퍼러리 춤꾼들의 작품 12편이 무대에 오른다. 시대의 변화에 맞게 폭넓어진 한국춤의 언어를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낸 작품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다. 국립정동극장 정성숙 대표이사는 "근현대의 급변하던 격동의 세월 속에서 시대에 따라 우리만의 독창적인 색깔로 새로움을 추구했던 한국 창작춤의 흐름을 담아낼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귀한 자리에 춤을 사랑하시는 분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라고 공연을 올리는 소감을 전했다. 4월 4일부터 매주 화·목 19시 30분에 공연된다. 3월 7일부터 국립정동극장 공식 홈페이지 및 인터파크를 통해 예매할 수 있다. 공연일 테마 출연자 작품명 4/4(목) <조선의 마음에서 태어난 춤> 1920년대 이후: 신무용의 등장 김선정 배구자의 에여라 노아라 노해진 배구자의 타령춤 안나경 최승희의 초립동 최승희의 검무_격(格) 최신아 최승희의 쟁강춤 국수호 조택원의 가사호접(袈娑胡蝶) 김형남·김호은 조택원의 만종 4/9(화) <꺼지지 않는 창작의 불씨> 1950년대 이후: 신무용 2세대 정민근 김진걸의 내 마음의 흐름 안귀호 김백봉의 청명심수 정혜진 최현의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 김혜윤 황무봉의 연연(連緣) 윤미라 최희선의 달구벌입춤(達句伐立舞) 손병우 송범의 참회 김장우·최영숙 송범의 은하수 4/11(목) <춤의 새로운 도화선> 1970년대 이후: 한국창작춤의 등장 최지연 김매자의 광(Shining Light) 김성의 김매자의 日舞 <하늘의 눈(目)> 이고운 배정혜의 유리도시 김세령 배정혜의 떠도는 혼 계현순 문일지의 멀리 있는 무덤 이윤경 국수호의 비천(飛天) 4/16(화) <타오르는 창작의 혼> 1970년대 이후: 한국창작춤 2 윤덕경 해를 마시다 정은혜 언제나... 그리고, 그러나 백현순 다시 꽃밭으로 이애현 봄날의 기억 태혜신 사르다 남수정 락무(樂舞) 4/18(목) <미래를 밝히는 정열의 횃불> 1970년대 이후: 한국창작춤 3 손인영 유유유(有.柳.流) 박시종 달빛아래, 농(弄) 김수현 홀연춘풍 만목개화(忽然春風 蔓木開花) 윤명화 메타포 3 홍경희 흰 바람 소리 윤성주 담청 4/23(화) <거침없는 창작의 불길> 2000년대 이후: 한국창작춤 4 이정윤 백송(白松) 황재섭 금시(琴詩) 조재혁 현 一. 안덕기 허튼가락춤 김평호 정글-봉우리 김용철 붉디 붉은 4/25(목) <새로 피어나는 춤> 2010년대 이후: 컨템퍼러리 한국춤 이이슬 HOME(solo ver) 황서영 버티- 송윤주 MUSE 이지현 한몫 보연 율곡(汩曲) 유선후 우아한 우주(Elegant Universe) 4/30(화) <청춘의 춤, 작열하는 푸른 불꽃> 2010년대 이후: 컨템퍼러리 한국춤 조인호 BIRTH 박기환 香그이 김주빈 새다림 SeDarim 박철순 동화(홀로 서기) 기무간 비로소:걷는 사람 정명훈 흐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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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무용협회 예술대상에 미나유·조기숙·유정숙·남수정대한무용협회는 '2023 무용 분야 예술대상' 현대무용 부문에 미나유 서울탄츠스테이션 크리에이티브 어드바이저, 발레 부문에 조기숙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선정했다고 19일 밝혔다. 예술대상 한국 전통무용 부문은 유정숙 김진걸산조춤보존회 회장이, 한국 창작무용 부문은 남수정 용인대학교 교수가 받았다. 미나유는 현대무용 인재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점이, 조기숙은 발레 대중화를 실현한 교육자라는 점이 인정됐다. 유정숙은 한국 전통무용의 명맥을 잇고 우리 춤의 우수성을 알린 점이, 남수정은 독창적인 안무 철학과 다양한 예술적 시도를 보여준 점이 높이 평가됐다. 시상식은 이달 26일 대한민국예술인센터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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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우봉 이매방의 삶과 예술춤생애와 무용사적 의의 1. 들어가는 말 "하늘이 내린 춤꾼’,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하는 전통춤꾼’이라 칭송되는 이매방(李梅芳)이기에 더더욱 이 시대의 국무로 꼽지 않을 수 없다. 그가 2015년 8월 7일 88세로 영면하였다. 필자가 볼 때 한국 전통춤을 오늘날처럼 곱게 다듬고 정립한 전통무용가는 한국무용사에서도 유일한 분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명창 중에서도 뛰어난 명창을 ‘국창’이라고 하는 만큼, 명무 중에서도 빼어난 명무를 ‘국무(國舞)’라고 한다. 그러면 무엇이 이매방을 국무로 칭하고 인정하게 될 만큼 춤꾼으로 만든 요인들이 무엇이었을까 살펴보기로 한다. 이매방은 1927년 5월 5일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7세 되던 해에 목포 권번(券番)의 권번장 함국향의 눈에 들어 춤 학습을 받았고, 목포 권번에서 승무와 검무 그리고 고법을 가르쳤던 이대조(李大組) 명인으로부터 춤과 북놀이 사습을 8년 동안 받았으며, 주로 여자들만 입학할 수 있었던 권번에서도 유일하게 남자 학습생으로 들어가 남다른 사랑을 받으며 전수받았다. 오늘날 이매방은 국가무형문화재 제 27호 승무와 제97호 살풀이춤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것도 그의 외길 춤인생에서 갈고 닦아진 예술적 가치와 전통적 맥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2. 이매방의 춤생애 1) 입문기(入門期, 1930년대)-목포권번과 만주대련의 소년시절 이매방은 1927년 음력 3월 7일(호적상 1927년 5월5일)에 전라남도 목포시 대성동 186번지에서 부친 이경식(李敬植)과 모친 조병림(曺炳林) 사이에서 3남2녀의 막내둥이로 태어났다. 이매방은 태몽과 관련 독특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 모친 조씨는 이매방을 낳기 전 태몽에서 모친이 밭에서 호미질을 하는데 동그란 불덩이가 굴러와 치마폭에 안기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 명무로서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을 예고한 것이었다.이매방은 세 살적부터 끼가 발산된 천생의 춤꾼이다. 어려서부터 계집애들 같이 누님의 치마저고리를 입고 옷고름을 매만지며 경대 앞에서 춤추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매방은 여자 같은 행동을 보고 부모형제들은 미쳤다고 야단법석이면서도 그가 철이 안 들어 그런 것일 거라고 지나치곤 하였다. 그가 초등학교 입학 전인 7세(1934년)가 되던 해 옆집에 세 들어 살던 조도 출신 목포권번의 권번장 함국향(咸菊香)씨가 그의 춤추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춤 학습을 권유하였다. 한편 이매방의 할아버지벌격인 이대조(李大祚, 김금옥에게서 춤사사)씨는 호남일대에서 명성이 높았던 춤의 명인으로써 승무와 북놀이에 탁월한 예인이었다. 이매방의 할아버지이면서 스승이었던 이대조 명인은 목포 권번(卷番)에서 승무와 북놀이, 검무 그리고 고법(鼓法)을 가르쳤던 권번 선생이었다. 당시 목포에는 포배당이라는 절마당 앞에 드럼통을 이삼십개 깔고 판자를 올려 가설무대를 만들어 공연을 하였다. 이때 이대조(1870년초~1950년대, 북반주)와 한성준(1874~1941, 장구반주)이 서로 잘 아는 친구사이로 공연에서 이동백, 이화중선 등의 반주를 맡았다. 절에서의 공연은 조선시대 굿중패, 절걸립패, 사당패들의 근거지이며, 공연장이 절이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까지도 이러한 연희문화 현상은 지속된 것이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매방은 함국향씨가 소개한 목포권번에 입문하게 된다. 이매방이 목포 권번에 입문하여 춤뿐만 아니라 판소리 학습도 함께 시작하였으나 판소리는 그의 목청이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청이 터지질 않아서 곧바로 그만두었다. 이렇게 시작된 이매방의 춤과 북놀이 학습은 8년 동안 계속 이어졌다. 여자들만 입학할 수 있는 권번에서 유일하게 남자 학습 생이 들어가자 주위 선배들과 동기들은 귀염과 사랑을 듬뿍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호남 권번에서 다양한 춤을 익힌 이매방은 유년시절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기를 맞는다. 중국 대련에서 운수회사를 운영하던 큰 형님에게 가서 약 5년간을 지내게 되면서 대련 정포소학교(1935~1939)를 다니면서 그는 매란방, 배구자 등을 만난다. 그리고 12세 무렵 대련에서 우연한 기회에 신무용의 대가인 배구자 무용공연에 출연하게 된다. 또 북경에 있던 큰 누나의 연결로 당대 최고의 경극 배우 매란방(梅蘭芳)과 조우한다. 매란방의 공연을 접하고 이국적인 향취에 매료되어 그에게 <장검무>, <등불춤>, <꿩털춤> 등을 배운다. 공연 때마다 무대에 오르는 이매방의 장검무는 그때 매란방에게 배운 장검무의 기법을 토대로 창작된 춤이다. 6. 25 이후에는 본명 이규태를 버리고 매방(梅芳)이라는 예명을 지어 사용하게 되는데, 매란방에게서 배우고 느낀 예술혼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되는 대목이다. 그러다가 대련정포소학교 5학년 때(1939년) 말도 잘 안통하고 해서 고향 목포북교소학교에 전학하여 졸업하면서 본격적으로 춤에 정진하게 된다. 2) 학습기(學習期, 1940년대)-역경 속에서 다져진 승무로 데뷔무대목포소학교를 졸업 후 이매방은 뜻에 없었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로 마음에 없는 목포공립공업학교를 입학(1940년)하였다. 공업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항시 그의 마음에는 춤사위와 북놀이가 떠나질 않았었다. 원래 손재주가 있어 자신과 제자들이 입을 의상은 물론 공연에 필요한 무구(舞具) 소품들을 직접 바느질하거나 제작하였다. 성격이 섬세하고 꼼꼼하여서 바느질 솜씨가 일품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의 결벽성과 치밀한 성격으로 아무리 소소하고 간단한 것이라도 매사가 완벽하게 갖춰야 하는 성품이므로 그의 바느질 솜씨는 전문적인 한복 제작자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대접을 받았다. 1942년(16세) 목포역전에다 쇠가래를 세워 그 위에 막을 치고 드럼통을 깔아 만든 가설무대를 만들어 놓고 밤낮 춤과 소리로 명인명창대회를 열고 공연을 했었다. 그런데 승무를 담당한 박봉선이 사정이 생겨 춤을 출 수 없는 상황이 생겼다. 목포 사는 신두옥도 놀음을 나가 없었고, 성산호주 역시 결혼을 하여 무대에 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임방울은 승무를 추어야할 사람이 갑자기 참석치 못하게 되자 함국향에게 승무를 대신해서 출 사람을 수소문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함국향선생은 마침 이매방의 춤이 무르익은 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곧바로 이매방을 불러 임방울선생에게 소개하였다. 그리하여 이매방이 김연수의 장삼을 빌려 입고 무대에 나섰다. 피리에는 임세균, 거문고에는 한갑득, 설장고에는 전사업, 전이섭, 김오채 등 당대 최고의 명인들과 함께 한 무대였다. 이때 이매방은 승무를 춤추어 관객의 열렬한 호응 속에서 첫 데뷔무대를 가졌다. 그리고 해방 후로는 그동안 배운 실력으로 1948년 임춘앵의 여성국극단에 삼고무를 가르쳐 여성국악인들의 공연을 도와주었으며, 그해 승무로 첫 데뷔했던 목포 역전에서 다시 임방울이 이끄는 명인명창발표회에 승무로 출연하였다.이처럼 1940년대는 본격적인 춤과 가락을 익히는 학습기였다. 그동안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는 방학 때 귀국하여 간간히 춤을 익혔지만 목포로 전학한 후로는 당내에 명성을 날렸던 박영구(화순 능주출신)선생에게 학습하기 위해 주말마다 광주를 오가면서 광주권번을 다녔다. 당시 박영구선생은 광주권번에서 승무와 북놀이를 가르치고 있던 권번선생이었다. 광주권번에서 박영구선생과 함께 춤선생으로 있던 이창조(장성출신)선생에게는 검무를 학습하였다.목포권번과 광주권번을 오가며 박영구, 이창조, 그리고 이대조(무안출신) 선생에게서 승무, 승무북놀이, 검무, 입춤, 살풀이춤, 장고춤, 태평무, 한량무, 보렴승무, 흥춤, 장검무, 장고기법들을 배웠다. 특히 이대조에게서 가장 많은 레퍼토리를 배웠으며 이대조의 북가락은 다양하고 가짓수가 많아 ‘천수북’이란 말이 전해졌다. 오늘날까지 이매방 북가락이 일품이라고 하는 것은 이대조로부터 전수받은 가락이다. 3) 방랑기(放浪期, 1950년대)-6.25사변 군예대 활동-대구, 군산, 부산, 광주, 서울해방 후 진지하고 평화롭게 예인의 길에 정진하던 것도 잠시뿐 1950년 6.25사변이 터졌다. 북한군의 뒤를 따라 예술동맹 공연단들이 내려와 목포에서 인민들을 위한 위문공연에 최승희의 딸 안성희와 전황(본명 전두황, 전옥의 동생, 전미례의 부친), 최옥산, 임종옥, 한계만, 유선도, 이경팔, 박정호 등이 내려와 공연한 것을 이매방은 보게 되었다. 이때 전황은 <처녀총각>, 안성희는 <장검무> 등을 추었다. 그리고 이매방을 강제로 무용동맹에 가입시켜 무용활동을 시켰다. 당시 무용동행위원장에 차범석, 국악동맹위원장에 장월중선 등이었다. 무용동맹에서 춤을 가르치거나 공연을 하였고 또 국악동맹에 가서 안무도 해주며 지냈다. 안성희가 "규태동무 북조선으로 갑시다”하는 바람에 피신해 있었지만 수복 후 국군이 들어와 무용동맹에 강제로 가입했던 것에 곤욕을 치루었다. 가까스로 해명하고 국군 군예대(KAS)에 가입하여 1951년 대구 역전 태평로에 본부를 두어 활동했다. 그 때 군예대에는 황해(전영록 부친), 허장강(허준호 부친), 그리고 무용가 김진걸, 황무봉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군예대(종군연예인공연단) 일원(1951년)으로 활동하면서 지방순회공연을 다녔다. 또 광주에서 전라남도 경찰국 선무공작단을 맡아 단장으로 호남 일대를 돌며 순회공연을 한다. 이렇게 지방순회공연을 하던 중 군산에서 연구소를 개설해주겠다는 유지들이 나타나 이매방이 24세(1951년)에는 잠시 군산으로 옮겨 군산시 영화동에다 이매방무용연구소를 개설하여 2,3년간 활동을 하였다. 그때부터 이 매방은 그가 직접 운영하는 연구소를 통하여 그의 춤과 북놀이를 전수하기 시작하였다. 군산에서 무용연구소를 운영할 때 춤을 배웠던 제자들로서는 박문자, 김옥순, 양향옥, 그리고 채영옥 등이 배웠다. 1953년에 문하생들을 데리고 광주에서 첫 발표회를 가진다. 그 후 1953년 부산으로 내려가 장홍심이 운영하는 영도에 함께 연구소를 했지만 결별하였다. 부산에서의 제자는 김진홍, 성승민, 이도근 등이 있었다. 1954년 광주로 옮겨 남동 양조장 옆에 국악원을 개설하여 어리지만 춤을 잘 추는 한순서를 조교로 무용연구소를 운영하면서부터는 쇼무대나 악극단 등 순수 무용활동 이외의 출연은 일체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문하생들과 함께 광주에서 다시 이매방의 무용발표회(1955년, 광주극장)를 가졌다. 한편 서울에서는 올라와 창신동 신익희의 딸 신영균의 집에서 활동을 하였다. 이때 서울에서는 여성창극단, 삼성여성국악단(박옥진, 박보아, 조양금 3인)등에서 잠시 활동하다가 1955년 부산으로 내려가 초량동에 자리잡았다. 그동안 부산에서 초량동, 범이동, 대신동 등지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1956년 대통령 입후보했던 신익희의 사망으로 인하여 서울연구소를 청산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부산에서 첫 발표회를 대영극장(1957년)에서 공연을 하였다. 이때에도 어리지만 춤을 잘 추는 한순서의 역할이 켰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1959년 원각사에서 발표회를 가졌다. 이매방의 공연작품으로 역시 <승무>와 <쌍검무>로 전통무용의 진수로 보여주며 춤기법이 매우 빼어났음을 표현하면서 전통에만 매달리지 말고 현대적인 무대예술로 승화되면 좋겠다는 평을 하였다. 당시의 이매방의 춤활동은 전국적으로 목포, 대구, 부산, 광주, 서울이었지만 주근거지는 사실상 부산이었다. 임시수도였던 부산에 많은 예술인들이 체류하였었고 일부는 잔류하면서 예술의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이매방도 1950년대 중후반까지 부산에 중심을 두어 고전무용의 중심인물이었고 부산무용가협회 정회원이었으며, 1957년과 58년에 부산공연을 올렸으며 1960년대 말까지 부산에 둥지를 틀었다. 4) 정립기(定立期, 1960년대)-다양한 춤 레퍼토리1960년대는 1950년대를 이어 많은 무대를 누비면서 점차 춤 레퍼토리를 확대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우선 이매방은 그의 선생에게서 배운 북놀이를 그가 혼자 활동하던 1948년 북3개를 놓고 추는 삼고무를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창작하였지만 그 후 북5개를 놓고 치는 5고무, 7개를 놓고 치는 7고무 그리고 9고무와 11고무로 확대하였다. 따라서 전국 각지에서 연희되고 있는 삼고무의 원조는 이매방류라 할 것이다. 그리고 <초립동>, <화랑무>, <검무>, <장검무>, <박쥐춤>, <흥춤>, <무당춤>, <장고춤>, <학춤> 등을 정립하였고, 늘 추어온<승무>, <입춤>, <검무> 등과 함께 추었다. 그러한 이매방의 춤예술 정립은 그의 탁월한 예능적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까지도 이매방의 주 활동무대는 부산이었으나 점차 활동무대를 서울로 넓혀나간다. 그리하여 1967년 10월에는 서울 명동국립극장에서 창작무용 <꽃신 짚신>발표회를 가졌고, 1968년 8월에 일본 대판(大阪) 상은 창립 15주년기념제전(대판후생회관)에 초청되어 <승무>로 출연하였고, 이어서 제23회 광복절기념공연(일본동경 거류민단 본부 주최)에 <승무>를 추어 갈채를 받았다. 5) 비상기(飛翔期, 1970년대)-전통춤의 예술성과 가치 인정1970년대 초까지는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으나 이매방의 승무가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연구소를 서울로 옮겨 현재까지 서울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물론 서울에서 한 때 1956년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선생 집에 신세지며 서울 창신동에다 연구소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6.25직후에 주 활동무대였던 부산에서의 활동은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매방은 <보렴승무>, <삼현승무>, <살풀이춤>, <검무>, <입춤>, <한량무>, <태평무>, <흥춤>, <장검무> 그리고 <장고춤> 등도 <승무>와 함께 끊임없이 연마하여 왔다. 1970년대 초부터 이미 국악계에서는 이매방의 춤의 가치를 파악하고 많은 국악제전에 초청하여 출연하게 된다. 1970년부터 매년 부산에서 3.1절 기념 국악대제전에 <승무>공연, 1973년 4월 동래야류발표회에 <승무>초청공연, 그해 12월 전통예술감상회에는 <초립동>을 공연하였다. 1974년 5월 인간문화재 초청공연에 <승무>로 초청이 되었고 12월에 무용대공연에는 <화랑도>(전주삼남극장)로 출연하였다. 1975년 5월 강백천 대금산조발표회에 <승무>출연(부산민속예술관)하였고, 8월에는 이선옥 초청 신적무용발표회에 <사랑과 이별>을 안무하여 이선옥과 2인무로 출연(국립극장 소극장)하였다. 이선옥과의 콤비를 맞추게 되면서 그동안 함께해온 한순서는 자연히 독자적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76년 1월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 무용공연 <신검(바리공주)>를 부산시민회관에서 가졌다. 이리하여 이매방 선생이 서울무용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중앙대 명예교수인 무용학자 정병호에 의해 1977년 7월30일 서울 YMCA에서 한국전통무용발표회에서 승무를 추면서부터이다. 전통무용연구회(회장 정병호)가 주최한 <이매방 승무 발표회>에서 삼현승무와 보렴승무를 추었고, 찬조로 김소희 국창의 판소리(고수 김득수)와 이선옥의 살풀이춤이 올려졌고, 악사에 지갑성, 전태용, 이생강, 김순봉, 오주환, 서용석, 김한국 등이 반주하였다. 이 자리에서 정병호 교수가 최초로 ‘승무의 미학’를 발제하였으며 안내장에는 김천흥의 축사가 기록되었다. 또한 이날 이매방 춤을 감상하고 조선일보 기사에 발표한 홍종인은 다음과 같은 평문을 남겼다."등골이 으쓱 들었다가 놓는 그 순간 그 깊은 한숨소리는 들은 바 없었으나 그 순간의 한숨은 하늘이 꺼지는 듯 깊은 느낌이었다..... 이씨의 춤이 각별하다는 점은 악곡이 지닌 장단과 가락 속에 섬세하고 대담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온몸에 매듭과 힘줄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부분에 작동하고 있다는 그 기교를 훨씬 넘어서 그의 전신에 넘쳐 흐르는 예술적, 창조적 그리고 또 즉흥적인 감흥이 압도적이었다는 데에 있다 할 것이다”(홍종인, "이매방씨의 승무를 보고”, 『조선일보』(1977년 8월 3일자).홍종인의 평문은 사실상 이매방의 전통춤이 우리 무용계에 새로운 별이 등극했음을 시사는 글이다. 감상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춤, 전율을 느끼게 하는 춤, 심장박동을 자극하는 북가락, 섬세하고 고운 춤사위에 모두 감동을 받은 공연이었음을 암시해준다. 아울러 그때까지 한성준류의 한영숙 승무에 매료되었던 이들에게 새로운 유파의 승무가 있음을 지상을 통해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무대에서의 성공은 이듬해 1978년 3월 세계민속예술제 한국대표로 프랑스 렌느시에 참가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6) 만개기(滿開期, 1980년대)-<북소리> 시리즈와 승무 예능보유자 인정평생 춤의 길을 걸으면서 외길로만 살아온 이매방은 지난날의 춤생활을 돌이켜 보면 한과 정으로 가슴이 벅차다고 말한다. 이매방은 평생 동안 춤을 추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광대, 굿쟁이, 기생, 당골소리 등 별의별 말을 다 들으며 살아왔다. 거기에다 이매방의 성격이 직설적이고 입바른 소리를 잘 할 뿐 아니라 수틀리면 욕잘 하기로 유명한 그는 호랑이, 사자이빨, 따발총, 직사포, 욕보, 욕대장 등의 별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나타난 한 면일 뿐이다. 이매방의 내면에는 그간 겪어온 진솔한 삶의 모습과 예술혼이 오롯이 담겨있다. 그래서 당시 이매방 춤의 진수를 처음 제대로 알아본 이는 당시 전통무용연구회장이던 중앙대 정병호 교수였다."이매방씨가 예술가로서 높이 평가받는 것은 거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승무의 명무자라는 것과 오늘의 북틀춤을 탄생케 한 창조자로서의 장본인이라는 점일 것이다. 이씨의 승무에서 돋보이는 것은 하나는 그가 치는 북놀이이다. 그는 북놀이를 할 때 마치 한(恨)을 풀 듯이 신명나게 치고, 감정을 한곳으로 몰입시켜 주술경에 도달한 정도이다....이매방의 승무는 비단 춤사위의 멋 만이 아니라 북놀이에도 그 정수를 느낄 수가 있다. 그의 북놀이는 궁편과 각을 조화있게 타주(打柱)하는 가운데 많은 가락을 만들뿐만 아니라 그 기교는 무아경(無我境)에 이르는 신비스런 율동이다”.(정병호, "이매방의 승무”, 『전통문화』,1984년 5월호)이매방의 천재적 재능을 발견하고 무대공연을 주선하는 등 그가 문화재 반열에 오를 수 있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민속학자 정병호는 그의 춤 중에서 승무를 으뜸으로 꼽는다. 승무에 있어 북틀의 창시자라는 점과 감정이입에 입각한 승무의 춤사위를 주술적 무아경에 이르게 하는 신비한 묘술로 풀어내면서 이매방을 최고의 춤꾼으로 극찬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리고 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받도록 조사에 착수하여 이매방 승무의 가치와 미학을 연구하였다. 당시 정병호교수의 제자로 연구에 참여했던 필자도 함께 YMCA 이매방 승무발표회(1977년), 이매방전통무용의 밤(명동유네스코회관, 1981년)을 동참하였고, 이매방춤 마포연구소에 찾아가 면담하면서 특히 당시에 이미 승무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던 고 한영숙 승무와의 차별성과 승무의 미학과 지역적 특징을 중심으로 비교 연구하였다. 이매방 춤판 최고의 결정판 <북소리> 씨리즈의 시작이었다. 1984년 6월 이매방 무용인생 50주년 기념공연 <북소리>(문예회관 대극장)에 이어 1985년 6월 이매방 전통무용 <북소리 Ⅱ>였다. 또한 전통예술의 보급과 선양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결과로 정부로부터 옥관문화훈장(1984)과 성옥문화상 문예부문 대상(1995)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편 중요무형문화재 인정에서 보류된 이매방의 승무에 대해 사생활과 예술세계는 별개라는 당시 정병호 문화재위원의 일관되고 끈질긴 노력과 더 열정적으로 이매방 승무를 알리기 위해 1981년 유네스코 회관 공연을 주선하여 문화재위원들을 초청하여 이매방 승무의 예술적 가치와 지역성과 전통성을 알리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결과 1987년 7월1일 이매방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어 명실상부한 명무의 대열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1989년 일본무용예술제 참가와 국악대공연에 참가 등의 더욱 왕성한 공연활동을 펼치게 된다. 7) 결실기(結實期)(1990년대)-살풀이춤 예능보유자 인정과 이매방 춤인생 60년1990년대의 이매방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에 이어 1990년 10월10일 제97호 살풀이춤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아 전통춤의 최고 명인으로 추앙받게 되었으며 수많은 한국무용가들이 이매방류 춤을 전수받기 위해 구름같이 모이게 된다. 서울에 정착한 후 이매방은 창신동, 돈암동, 대현동, 운니동, 삼성동, 그리고 마포를 거쳐 지금의 양재동에 이르기까지 이곳 저곳을 옮겨가며 무용연구소를 운영했었다. 그후 지금까지 무용연구소를 중심으로 제자를 양성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는데, 한국무용계를 대표하는 무용가들 대부분이 그의 춤을 전수받은 제자들이다. 하지만 춤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제자로 들이지 않는다. 새로 입문할 사람이 재능이 없어 보이거나 꾸준히 학습에 임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않는다. 승무와 살풀이춤의 보유자로 인정되자 그의 많은 옛 제자들이 다시 찾아들기 시작하였고 새로이 입문한 문하생들이 그의 춤과 북놀이를 배우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었다. 1990년의 활동은 ’90 북경아시안게임 문화예술축전 참가와 이매방 전통무용 <북소리Ⅲ>(호암아트홀)를 가진 후, 1991년 미국순회공연, 1992년 유럽순회공연을 마치고 1994년에 춤인생 60년을 정리하는 <북소리 Ⅳ>를 가진다. 이어서 1995년 광복50주년 민속종합예술제 출연과 1996년 인생70 고희기념공연, 1997년과 98년 일본공연을 가졌고,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 참가한다. 1999년에 우봉 이매방 춤인생 65주년 기념 대공연을 가지면서 1990년대 20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천년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였다. 8) 국무기(國舞期, 2000년대)-외길인생 우봉 이매방 춤 70년격변기를 살아온 우리의 춤선구자 대부분이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왔듯이 명무 이매방의 삶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몇 년 전 이매방은 또 한 번의 고비를 맞았다. 2001년 갑작스럽게 발병한 위암으로 투병생활을 해야했다. 주위의 걱정과 안타까움 속에 위 대부분을 도려내는 수술을 받고 몸무게가 15kg 빠지는 등 체력이 급격하게 저하되어 활동이 어렵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매방은 작년 ‘우봉이매방팔순기념공연’을 성공적으로 치뤄냈다. 직접 살풀이춤과 입춤을 추는 저력의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오직 춤만을 생각하는 열정이 아니라면 감히 이루어 내지 못할 일이다 ‘우봉 이매방 춤 전수관’은 2005년 7월 목포문화예술회관 1층에 마련된 이매방의 살풀이와 승무를 전승하는 공간으로 이매방의 이수자들이 승무와 살풀이춤, 입춤, 삼고무 등의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지난 2006년부터 개최되고 있는 ‘우봉이매방춤경연대회’는 이매방의 예술혼을 예향 목포 이미지로 연결시키기 위해 창립된 행사이다. 전통춤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이매방의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3. 우봉 이매방 춤의 무용예술적 가치 이매방의 춤에서는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는 호남제 시나위 춤사위로 짜여져 있다. 그중 대삼소삼(大杉小杉), 비정비팔(比丁比八), 양우선(兩雨線), 비디듬, 좌우걸이, 완자걸이, 잉어걸이, 지숫기 등의 곱고 아름다운 사위와 자태를 자아내고 한을 신명으로 풀어내는 정중동의 몸놀림이 배어나온다. 결국 이매방춤은 호남 지방의 권번에서 추어왔던 춤사위 기법이지만 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본인 스스로의 속멋에서 우러나온 춤으로 발전된 것이기에 단순한 전수춤이 아니라 스승들의 춤을 뛰어넘어 본인의 혼을 담은 전통춤이었기에 아무도 넘겨볼 수 없는 국무의 자리를 지켜온 것이다. 이제 우봉 이매방이 왜 국무의 칭호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거론하고자 한다. 첫째는 남자이면서도 여성보다도 더 곱고 섬세한 기방계통의 ‘춤바디’와 여성적 ‘춤속’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전승되는 한국 전통춤의 기법과 미학적 표현법을 볼 때 우봉 이매방 만큼 아름다운 춤사위를 구현하는 전통무용가는 없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더 나아가 이제까지 한국 전통춤의 역사상에서도 우봉 이매방 만큼 아름다운 춤사위를 구가하는 무용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면 왜 이처럼 아름다운 춤사위기법을 가지게 되었을까? 몇 가지 추론되는 점이 있다. 하나는 어릴 적 처음 춤입문에서 고운춤만을 추는 기방에서 춤을 보고 배웠기 때문이다. 당시 목포권번 함국향이라는 권번장이 이웃에 살아 그 집을 드나들면서 기방춤을 처음 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여자처럼 예쁜춤의 기본이 몸에 배여있어 이매방춤에는 기방예술의 전형적 아름다움을 담겨 있다. 그리하여 이매방이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여성들보다도 더 여성적인 기방춤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전통소리꾼들에게는 유파별로 또는 계통별로 ‘소리바디’가 있듯이 이매방의 춤맵시에는 이미 기방계통춤의 고운 ‘춤바디’가 형성된 것이다. 그렇지만 남자가 아무리 아름답게 춘다고 해도 여성만큼 섬세하고 아름답게 추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한계성을 극복하는 그 무엇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이매방은 성의 정체성을 뛰어넘는 여성적 감수성이 정신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아무리 춤바디가 기방계적 표현력을 지녔다 해도 대개의 남자춤꾼들은 남성의 ‘춤속’이라는 본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매방의 춤사위와 표현법에는 여자보다 더 여성화된 ‘춤속’을 지니고 있다. 제아무리 성정체성이 뒤바뀐 남성춤꾼이라 해도 모두 춤속이 여성화되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뒤섞인 혼성춤속이거나 어설픈 여성춤속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매방은 완벽한 기방계 ‘춤바디’에다 가장 섬세한 내면적 정서의 여성보다 더 여성적인 ‘춤속’을 지닌 특별한 춤꾼이다. 둘째, 호남지역의 명무들로부터 뼈대있는 전통춤을 다양하게 전수받아 호남춤의 정통성을 확립하였기 때문이다. 목포권번에서 호남기생에게 처음 춤을 사사한 이매방은 그후 이대조, 신방초, 박영구, 이창조 등 호남지역의 명무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전통무용가로 성장한다. 맨 처음 정식으로 춤을 가르친 이는 이대조는 무안 출신으로 목포권번 사범으로 춤과 음악에 능통한 전통예인이며, 이매방에게 승무, 검무, 장고춤을 가르쳤다. 또한 옥과 출신인 신방초에게 육자배기, 화초사거리, 가곡, 검무, 승무 등을 익혔고, 10대 중반에는 광주권번에서 화순 출신 박영구 문하에서 승무와 북을 배웠고, 장성 출신 이창조에게 검무를 사사하기도 했으며, 춤과 기악에 능통한 이장선의 문하생이 되어 다양한 예능을 접하게 되었다. 스승 모두가 호남일대와 경향에까지 활동영역을 넓혀 궁중 어전 출입도 잦았던 당대 최고의 전통예인들이었다. 이처럼 이매방은 목포권번과 광주권번을 오가면서 권범사범들인 박영구, 이창조 등 호남의 제일가는 명무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승무, 승무북놀이, 검무, 입춤, 살풀이춤, 장고춤, 태평무, 한량무, 보렴승무, 흥춤, 장검무, 장고기법들과 다양한 춤가락을 익혀 호남춤의 특성과 미학을 정립한 전통성과 정체성을 보유한 명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간에 호남춤의 대를 이은 한진옥을 비롯한 몇몇의 호남춤의 명인들이 있었으나 크게 빛을 발하지 못하고 고향에서만 활동하다 잊혀져 갔다. 그러나 이매방은 고향 목포에 머무르지 않고 부산, 군산, 광주 등지를 거쳐 한국예술의 중앙무대인 서울로 진출하여 호남춤의 예술성을 범한국춤으로 위상을 높였다. 이매방 춤에서 전승되는 보석같이 소중한 호남제 춤사위는 실로 다양하다. 춤사위 용어상에 나타난 대표적인 춤사위 명칭은 대삼소삼(大杉小杉), 비정비팔(比丁比八), 양우선(兩雨線), 비디듬, 좌우걸이, 완자걸이, 잉어걸이, 지숫기 등이다. 이매방이 춤을 가르칠 때 매번 강조하는 대삼소삼은 장단의 강약을 따라 춤사위도 강약으로 표현하는 춤기법으로 강과 약으로 반복하면서 조율하여 추는 방식으로 춤의 섬세한 리듬성과 변화성을 보여준다. 또한 움직임의 기법 중 정중동 또는 음양의 조화를 표현하는 양우선도 중요한 춤 특징으로 손짓과 발짓의 모든 동작은 양우선의 원리를 따른다. 가령 발은 뒤꿈치부터 앞꿈치로 옮겨지고, 팔은 엎으면 반드시 뒤집고, 뿌리가 내려오면 끝이 올라간다거나 끝이 쳐지면 뿌리가 올려지는 등의 자연스러운 기교와 원리가 연출된다. 또한 보법에서 비정비팔(比丁比八)이라는 발디딤은 호남춤에서 내려오는 오랜 춤기법 중의 하나로, 발 딛는 자세가 한자의 정(丁)자 혹은 팔(八)자의 모양으로 딛는 독특한 형태의 보법이다. 오른발에 이어 왼발 끝으로 딛어 오른발 옆에 옮겨 딛고 제자리에서 무릎을 굽혔다고 펴는 형태의 섬세하고 정교한 발디딤은 이매방 춤의 몸가짐과 돋음새, 오금새, 디딤새로 이어지는 걸음걸이의 진수이다. 셋째, 천부적인 예술적 감각과 재능성을 지니고 태어난 춤의 천재이기 때문이다. 이매방의 첫 스승 이대조는 그의 집안 할아버지벌이 된다. 즉 이매방의 집안은 스승이자 할아버지인 이대조 대(代)까지 대대로 무업(巫業)을 해온 무계의 혈통을 이었다. 이들은 오랜 세월 세습되면서 천부적인 예능성을 이어받아 오게 된다. 대개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 경우는 도중에 도태되지만 선천적 예능성을 지닌 유전인자를 지닌 예인들은 대를 이을수록 더 유명해진다. 이매방의 천재성은 이미 어린 나이인 15세 때 증명되었다. 목포역전에서 임방울이 가설무대에서 명인명차대회를 열었는데 승무를 추기로 한 박봉선이 불참하여 대타자로 승무를 추었으나 관중들의 찬사가 뜨거웠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매방은 이 모든 스승들의 춤기량을 뛰어넘는 춤기법과 춤사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천재만이 할 수 있는 재능이다. 그래서 천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현재까지 전승된 전국의 모든 류파와 계통의 전통춤 전승자와 명무들을 볼 때 이매방만큼 춤을 곱고 아름답게 구사하는 명무는 없었다. 바로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현재의 한국전통춤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었고 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바로 이 점이 이매방을 명무 중에서 명무인 국무로 호칭하는 것이다. 넷째, 현대교육개념으로 볼 때 어린나이부터 춤의 조기영재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매방은 예닐곱 살부터 목포권번에서 예기들의 춤을 접하고 춤 배우기를 권유받아 이대조로부터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를 만주 대련 정포소학교를 다니면서 방학 때면 북경 매란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거나 목포로 돌아와 춤을 배웠다. 이처럼 이매방은 어린 10대에 호남의 이름난 명인들 이대조, 신방초, 박영구, 이창조 등 호남지역의 명무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악가무를 두루 섭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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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72) <br>김진걸 명인의 '산조춤' 춤사위산조춤 신무용 제2세대 중 독창적 미적 감각 작품 중 역작을 꼽으라면 바로 1957년 첫 선을 보인 김진걸의 '산조춤'이다. "인간의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담긴 산조춤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가장 순수하게 소통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의 키워드입니다. 제 산조는 여러 스승에게 배운 다양한 춤사위들을 아우른 작업인데, 승무·탈춤·무속춤 등을 모두 함축했어요. 새로운 산조를 시도하고 싶어 의상도 비로드로 만들고 버선 대신 맨발에 발레슈즈를 신고 추었습니다.”(김진걸,1953년) ‘산조’는 기악 독주라는 뜻이다. 1953년 성금연의 가야금 산조에서 춤 영감을 얻어 추기 시작했고 1960년 ‘내 마음의 흐름’이라는 제목으로 김진걸류 산조를 발전시켰다. 산조음악과 발생을 같이하여 기방의 입춤 형태에서 파생된 산조춤은 인간 개인의 자유로운 감정을 신체라는 움직임의 매체를 통하여 표출해 내는 인간의 해방, 육체의 해방을 의미하고 있다. 그의 산조는 오른발과 왼팔 위주의 춤사위로 구성된다. 남성적인 춤사위는 탈춤에서 볼 수 있는 오른쪽 다리 직각으로 세워들기와 왼팔 내뻗기 등이다. 발사위가 은근하고 화려해 여성 무용수에게 인기있는 춤이다. 김진걸의 산조춤은 모든 전통에 그 맥을 두고 있으며, 동작의 시각적인 면에서 선을 강조하고 있다. 산조춤은 모든 한국장단을 갖고 있으며, 한국무용의 많은 춤사위의 표현요소가 내포되어 있는 춤으로써, 가장 즉흥성이 강하고 그만큼 창작의 면모에 있어서도 표현 범주가 광범위하다고 할 수 있다. 김진걸 김진걸(金振傑)은 ‘음악의 무용화’를 화두에 두고 삶의 희노애락을 춤사위에 담아낸 역작 '산조춤'을 발표했다. 1926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5세 무렵 춤에 입문했다. 1940년대 초반 일본무용가 요시키(吉木) 문하에서 현대무용을 배웠고, 조택원·장추화·이채옥에게 사사했다. 1955년 동양극장에서 첫 공연을 가졌고, 1959년 시공관에서 신무용적 미감이 짙은 작품을 선보여 주목을 끌었다. 1962년 국립무용단이 창단되자 초대 단원으로 발탁되어 후일 지도위원을 지냈다. 1974년부터 1992년까지 약 20여년간 한성대학교 무용과 교수로 재직했다. 대한민국 평화통일 문화상 대상(1983년), 제 7회 무용대상(1986년), 화관문화훈장(1987년), 예술문화 공로상(1988년) 등을 수상했다. 김진걸 약력1926년 서울적선동에서 8남매 중 막내로 출생 1942년 이채옥 현대무용연구소 입문 1940년 요시카 문화생 입문 1944년 길목 무용연구소 입문1946년 장추화 무용연구소 입문1959년 김진걸 무용연구소 개소1951~1953년 국방부 정훈군 육군 군예대 무용안무 1954~1975년 개인발표회 11차례 1955~1956년 성신여고, 한성여중·고 강사 1961~74년 한국무용협회 이사 1962~80년 국립무용단 지도위원 1974-1992년 한성대학교 무용과 교수 재직 1978~1985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1989년 『金振傑 散調춤 舞譜-내 마음의 흐름』(은하출판사) 출간 1989년 ‘김진걸 산조춤 무보’ 제작 1998~2008년 전통예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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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산조춤의 대가, 김진걸산조 춤의 명인 김진걸(金振傑, 1926-2008) 1926년 출생, 2008년 사망. 서울 출신의 무용가이다. 조택원의 뒤를 잇는 한국무용계의 맏형이자, 한국 신무용의 2세대를 대표한다. 1955년 동양극장에서 첫 공연을 가진 이래, 모두 11차례의 개인 발표회를 여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규모가 큰 무용극보다 '산조'(散調)등의 걸작을 만들었다. 아울러 김진걸무용연구소를 설립해 김영희, 조흥동, 이운철, 정명숙, 문일지 같은 재능 있는 무용 인재들을 배출했다. 그 밖의 주요 출연 작품으로 <영은 살아 있다>, <심청> 등이 있고 주요 안무 작품으로는 <배신>, <향토의 선율>, <초혼> 등이 있다. 제자로는 임미자, 조흥동, 민준기, 이운철, 정명숙, 김세일라, 문일지, 김숙자, 김경자, 심의식, 정금란, 조카딸 김수남, 정창영, 유정숙 등 우리 무용계를 빛내는 명인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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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근대 전반기 대구지역춤의 전승 인맥(人脈) 고찰Ⅰ. 대구지역춤의 생태문화적 환경 대구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남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더위는 심하고 기간도 길고 봄이 짧으면서 계절의 변화가 급속한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를 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된 영남북부의 교통,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또한 대구인들은 뛰어난 적응력과 강안한 개척정신, 의리와 결단력을 매우 중시하여 든든한 느낌이 든다. 배타적이고 무뚝뚝한 점도 있지만 애교있는 여성도 많고, 대도시라 그런지 덜 폐쇄적이고, 전통적으로 보수성과 선비정신이 높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지리와 기후환경적으로 대구지역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루고 있어 분지 내부의 복사열 등의 더운 기온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여 대체로 비가 적고 매우 건조하며,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덜 추운 지역이다.또한 역사문화적으로 넓게는 신라문화권에 속하며, 행정적으로는 영남북부문화권, 민속적으로는 백중문화권(단오 추석문화권), 내륙문화권이라는 광역적 성향도 기저에 깔려 있다. 따라서 대구지역만의 독특한 춤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미시적으로는 대구지역춤이며, 광역적으로는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고 있으면서, 거시적으로 한국춤계의 중요한 춤문화권과 영향력으로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시기 6.25한국동란으로 일시적이나마 대구에 중앙국립극장이 옮겨지면서 수많은 예술인과 무용들이 집중되는 현상으로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번 대구에서 펼쳐지는 세계안무페스티벌과 안무학술포럼을 통해 대구지역춤의 역사와 춤인물과 인맥과 현황을 고찰함으로써 대구지역춤의 역사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춤의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고 미래춤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조선조 전통문화시대를 지나 190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이전까지 서구문명과 외래문화의 범람시기에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소멸되어가던 전통춤 전승에 수구적(守舊的)이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춤인맥을 고찰하고, 또한 시대조류에 따라 새롭게 형성되는 국제적인 근대춤 정착에 헌신한 춤인맥을 살펴 대구지역춤의 전승과 무용사적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심도있는 연구가 아닌 포럼이기에 아쉽지만 개괄적인 고찰에 머물 것이며, 연구방법은 문헌연구로 그간 대구춤과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과 평문 등을 일별하여 요약문을 작성하였다. 대구지역춤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 등은 한국교육학술정보원(RISS)을 검색어를 통한 문헌 내용과 필자 소장문헌을 중심으로 고찰 정리하였다. 또한 대구무용계의 여명기를 개척한 1세대를 중심으로 뒤를 이은 2세대에 한하여 20세기 초중반기(개화기부터 1960년대까지) 무용인물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Ⅱ. 대구지역춤의 근대사적 배경 전통시대(조선조)의 춤은 대체로 궁중춤(정재, 일무), 민속춤(예인춤, 민간춤), 종교의식춤(불교춤, 무속춤) 등으로 전승되어 왔지만 우선 관심의 대상은 기방춤으로 궁중과 선상기(選上妓)로 활동하던 지방관기 전승의 교방춤과 기방춤으로 전승되어왔다. 대한제국시대와 한일합방의 급변속에서도 20세기(1900년대) 근대초기 관기제도의 폐지와 기생조합과 권번의 등장과 궤를 같이하며 경향 각지에서 나름의 전승체계와 색다른 공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기생조합은 1904년 10월 10일 일본공사관의 제3호 경성관령으로 비롯된 창기 창녀의 사회적 공식화부터 비롯된다. 궁내부 제도 개편의 일환으로 시행된 1905년 여악(女樂)의 폐지, 1908년 7월에 ‘향사이정조칙(享祀釐正詔勅)’으로 관기들이 소속된 태의원(太醫院)의 의녀(醫女)나 침선비(針線婢) 등이 해체되면서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그해 8월 24일에 장례원 장악과가 해체되었다. 아울러 1908년 9월 15일 기생 및 창기 단속령과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 제정 등에 의해 우리나라에 적용한 일제의 공창화(公娼化) 정책에 의해 설립된 전국의 기생과 창기들의 동업조합이 곧 ‘기생조합’이다. 한편 기생조합소는 기업(妓業)을 주관하는 사업체 및 운영 사무실을 지칭하는 것인데, 초기에는 기생조합 또는 창기조합이라고 불렸다가 1917년경부터 일본식으로 ‘권번(券番)’이라 바뀌었다. 한국의 근대화의 물결과 근대춤의 시작은 대체로 1900년 전후로 나타난 세계사적 물결과 주변국과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조선시대 말 갑오경장(1894년)과 대한제국시대에 거스를 수 없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문화조류가 파급되면서부터이다. 1902년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경성에 설립되어 그해 12월 4일부터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가 공연되었다. 그후 1907년 광무대(光武臺), 단성사(團成社), 연흥사(演興社), 1908년 장안사(長安社) 등 극장이 개설되었고, 광무대에서는 관기(官妓)의 가인전목단·검무(劍舞)·남무(男舞)·무고(舞鼓)·무동·성진무(聖眞舞)·승무(僧舞)·시사무(矢射舞)·이화무(梨花舞)·전기광무(電氣光舞)·지구무(地球舞)·한량무(閑良舞)등과 같은 춤 종목은 활동사진과 함께 광무대의 무대에서 공연됐다. 1915년 결성한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과 손잡고 광무대 7주년기념공연으로 새로 선보인 고구려무(高句麗舞)·공막무(公莫舞)·첨수무(尖袖舞) 등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청년학생음악단 내한공연(1921), 이시이 바쿠 내한공연(1926), 최승희의 <세레나데> 공연(1927), 배구자의 <아리랑> 공연(1928) 등으로 무용공연 등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한국의 근대춤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후기 대구 관기들의 활동 배경을 살펴보면,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대구지역에 감영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경주-상주로부터 이어져 온 감영이 옮겨오게 되었다. 곧 1601년(선조34년)에 경상감영이 대구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구는 경상도의 중심적 거점도시로 변모되면서 많은 국가적 지역적 행사가 많아졌다. 경상감영과 대구부(大邱府)에 소속된 관기(官妓)들의 공적(公的)인 악가무 활동이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 경상도와 관련되는 국가적 행사는 경상감영이 주관하여 이루어졌고, 대구와 관련되는 지역적 행사는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이 도맡아 행사를 치루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는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중구 포정동에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전 중앙공원) 일대이다. 영조 43년(1736년)에 작성된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는 경상감영의 부속건물로 교방과 취고수방(吹鼓手房)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1768년에 발간된 『대구읍지大丘邑誌』1)에 의하면, 경상감영 교방(敎坊)에는 41명의 예기(藝妓)가 있었고, 대구부에는 31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1888년에 자인현감 오횡묵(吳宖黙)이 적은 『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에 의하면, 경상감영 관하방(觀下房)에는 21명의 기생이 있으며, 대구부에는 17명의 기생이 영영교청(嶺營敎廳)에 소속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은 악기, 노래, 춤 등 각종기예를 익혀 각종 공적인 연회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상도 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대구부의 교방기생 31명과 관노 40명, 대구감영의 교방기생 35명과 관노 81명의 기록이 보인다. 그후 대구기생 향선(香仙)을 비롯한, 남수(藍水), 죽선(竹仙), 화월(花月)이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했음도 확인된다. 이와같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부터 실질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직제상 페지는 1908년) 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사회로 진출한 관기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 바로 1910년 5월에 결성한 ‘대구기생조합’이다. 또한 1905년 경부선 철로가 개통된 이후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상업성을 가지고 자금을 투자하면서 1922년부터 ‘대구권번’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7년 1월에는 한국인들의 주도로 관기 출신의 염롱산(廉隴山)을 권번장으로 하여 ‘달성권번’이 설립되었다. Ⅲ. 대구지역 근대춤 전승 인맥 대구 근대무용사의 대표적인 인물을 논하라 하면 주로 현대무용의 김상규, 주연희, 김기전, 정순영, 그리고 한국무용의 권명화 외 몇 분을 논하지만, 오늘날의 명맥 및 계승으로 살펴보았을 때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기점은 대구 출신의 정소산과 전남 나주 출신의 박지홍을 들 수 있겠다. 1. 정소산의 전승인맥: 김수희, 하규일→정소산→백년욱, 최묘정정소산은 대정권번 하규일의 문하생으로 1900년대의 근대무용사의 현장에서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서 궁중무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보존하며 대구 근대무용사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대구지역의 한국무용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기점을 마련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소산에 대한 존재감까지도 잊혀진 채 21세기 현재에 이르렀다. 영남지역의 대구를 중심으로 근대무용사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정소산의 무용활동에 대한 예술사적 평가는 대구 근대무용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며, 무용의 역사를 되짚어봄과 동시에 미래지향적 예술적 가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며, 기록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춤 인생과 무용사적 가치는 대구지역 근대무용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가치 척도가 될 것이며,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 할 것이다. 조선시대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 소속의 관기들은 대구지역의 전통음악을 오늘날까지 이어오도록 한 주역들이다. 조선시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이 제정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여 단체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대구의 관기 출신의 예기들이 주도적으로 1910년 5월 대구기생조합(大邱妓生組合)이라는 명칭으로 단체를 조직하여 명무(名舞) 김수희 조합장을 중심으로 결성하였다. 다만 김소희에 대한 이력사항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어 생년생몰 연대와 춤 경력에 대해 연구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대구기생조합이 개설되자 김수희 조합장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춤을 배우기 시작한 여섯 살(1910년) 난 어린 소녀가 정소산(본명은 정유색(鄭柳色), 호는 소산(小山), 1904-1978)이었다. 정소산은 1904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정사운과 상주 정진사댁의 막내딸로 어머니는 약방기생으로 유명했던 박남파 여사 사이의 1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형제들은 모두 비명에 죽었다. 정소산(유색)이도 어릴 적 몸이 약했는데, 기생이 되면 명이 길 운명이란 점장이의 말을 듣고 아버지 몰래 기생을 시키기 위해 춤을 배우게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구기생조합에서 김수희 조합장의 춤을 배운 후 정소산은 부산의 봉래권번<그림 2>, 수원의 화성재인청 등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17세(1921)에는 서울 대정권번에서 지냈다. 권번별 조합별로 조선의 예기들을 소개한 책 『조선미인보감』(1918)에는 원적과 현주소는 경성부 관철동으로 되어 있지만 경성에 머물던 주소인 것 같고, 원래 출생은 대구 중구 동성로 3가 12번지이다. 『조선미인보감』에 수록한 사진은 입적한지 1년 뒤인 18세 때 찍은 것이다.<그림 1> 원문에 보면 편모슬하의 무남독녀로 형편이 좋지 않아 권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쁜(좋은) 이마와 발을 가졌으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하는 특징이 소개되고 있으며 부드럽고 착한 성품으로 처음 보아도 구면에 본 것 같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 정소산의 인물과 성품이 나와 있는데, 이는 대구지방의 사투리 표현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정소산은 ‘다동조합’이 1918년 ‘대정권번’으로 바뀐(매일신보, 1918.1.27) 뒤 1921년 17세에 대정권번에 입적하여 당대의 명인으로 손꼽힌 인물 하규일(1867-1937)으로부터 1923년 19세에 본격적으로 궁중춤을 배웠는데, 김천흥이 전하는 하규일선생님이 가르친 궁중춤은 춘앵전, 무산향, 포구락, 장생보연지무, 무고, 선유락, 항장무, 가인전목단, 검무, 박접무와 재구성한 사고무, 성택무 등이었고, 여창가곡, 가사, 시조도 지도하였다. 하규일과 다수의 기생들이 1923년 대정권번을 탈퇴하여 그해 8월에 ‘경화권번’을 인수하여 설립한 ‘조선권번’으로 출범한 뒤에는 정소산이 직접 학감(1925년)이 되어 기녀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25년 23세 때에는 조선권번에 있던 대가 한성준(1874-1942)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그리고 1926년 이후 고향 대구로 돌아온 정소산은 1931년 3월 경북 예천에서 개최된 ‘예천대발전 신축낙성식 축하음악회’ 전단지로 대구조선정악단 일행이 출연한다는 팜플릿에서 확인된다. 달성권번 기생 신금홍을 비롯하여, 정류색(정소산)·황금주·이난향 등과 예천 기생들의 조연으로 소리와 춤을 공연하였던 것이다. 정소산은 가야금을 비롯한 춘앵무, 포구락 등 궁중정재와 살풀이춤, 승무, 장고, 법무 등을 탁월하게 추었다고 한다. 겨우 가정집 방 하나를 세내어 무용교습소라 차려놓고 가르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궁중정재 위주로 가르쳤으나 인기도 없고 수입도 수월치 않아 살풀이춤, 승무, 장고 등도 혼합하여 지도하였다고 한다. 42세(1946)에 처음으로 발표회를 열었고, 46세(1948)에는 하서동에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궁중춤 포구락, 무고, 검무 등의 전승과 보급에 힘썼다. 1969년 포구락, 검무, 무고의 궁중춤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지정 심사에 오르면서 그의 존재가 대구 지역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심사에서는 탈락했다. 궁중춤 이외에 잘 알려진 정소산류 춤은 ‘수건춤(흥춤)과 ‘달구벌 검무’로 유명하며, 1978년 사망할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국국악협회 3~5대 경북지부장, 경북 문화상(무용 부문, 1962), 문화공보부장관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정소산(鄭小山)(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자로는 그의 며느리였던 최묘정(최복순)과 백년욱, 김기덕, 김해덕, 양영숙, 이윤도, 강명자 등과 타지역 박금술(서울), 이화진(산주), 문소야(익산) 등이 있는데 현재는 백년욱 만이 지역무용계를 지키면서 정소산 춤의 맥을 잇고 있다. 1955년 열 살이 되던 해 정소산의 문하에 들어간 백년욱은 정소산이 타계할 때까지 스승과 함께하면서 정소산의 춤 세계를 체득했으며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제18호로 ‘정소산류 수건춤’으로 지정받았다. 정소산의 작품으로는 궁중무용을 중심으로 한 궁중무, 보구락(현재 궁중무용 포구락을 말함.), 무고, 검무, 춘앵무 등이 있으며 민속무로는 소고춤, 장구춤, 바라춤, 농악, 부채춤 외 창작무용으로는 여인의 미, 화랑무, 즉흥무, 조국의 혼, 무영탑, 미선, 꽃보담 내가 예뻐, 낙랑공주, 여인의 예상, 자명고, 단오놀이, 계월향, 낙랑공주, 논개, 직녀성, 원시인의 기상, 흥취 등과 무용극인 구운몽, 논개, 신라의 노처녀 등이 있다. 그의 춤 특징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춤을 추었으며 허리를 굽힌다던지 꼬는 동작들은 없었다는 것은 유장하고 의례적인 궁중정재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강태홍의 전승인맥: 강태홍→조산월 등 35명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수록된 예인 100인은 주로 서울과 평양 중심으로 조사기록한 것이지만 몇 명 안되는 여타지방 출신 중에는 대구출신으로 조산월(趙山月)<13>, 옥화(玉花)<43>, 향심(香心)<61>, 설경패(薛瓊佩)<74> 등 4명에 대한 개인소개가 수록된 것만 보더라도 대구의 조합이나 권번출신들의 서울진출을 확인해주는 기사라고 볼 수 있다. 이어서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 지송욱(池松旭) 편저)에는 조선 예기 611명의 화보집인데, 대구조합(大邱組合) 소속 32명(28명 대구출신, 4명은 타지방출신), 김천조합 3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1914년 매일신보에 기록된 조산월(趙山月)은 중복기록 되어 있어 옥화(玉花), 향심(香心), 설경패(薛瓊佩) 3명을 포함하면 35명의 인물들이 대구출신으로 춤과 가야금병창을 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구권번의 춤공연 종목은 고무(鼓舞), 승무, 각항(各項)정재무, 검무, 남무 등이었다고 하였다. 당시 가야금과 가야금병창과 춤을 가르친 명인은 전남 무안 출신의 강태홍(姜太弘,1893-1957)으로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기생)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었다. 이때 1918년 조선미인보감에 수록된 대구조합의 예기 32명중 춤 기예가 기록된 기생은 22명이다. 즉 염옥련(廉玉蓮: 23세, 정재무·남무), 이계화(李桂花: 22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와 김옥산(金玉山, 20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 도란옥(都蘭玉: 21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상남수(尙南秀: 16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안사운(安斯雲: 20세, 검무·승무·각항정재무, 이점홍(李点紅: 18세, 각항정재무), 권복경(權福璟: 21세, 정재무), 도송옥(都松玉: 18세,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승무), 노소옥(盧小玉: 17세, 승무·정재무), 이도희(李桃姬: 16세, 승무·정재무, 윤월향(尹月香: 18세, 검무·고무(鼓舞)), 백금옥(白錦玉: 14세, 검무·승무), 전무선(全舞仙: 18세, 승무), 강매월(姜梅月: 19세, 검무), 최경란(崔瓊蘭: 15세, 선승무(善僧舞)), 그리고 서운향(徐雲香: 14세), 이계란(李桂蘭: 14세), 백초월(白楚月: 14세), 김산옥(金山玉: 16세), 민봉진(閔鳳珍: 16세), 허경희(許瓊姬: 15세)는 승무 한 종목과 국악종목이 기록되어 있다. 종목별로는 승무가 15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서 정재무 11명, 검무 8명, 남무 5명, 고무 1명 등으로 나타났으며, 정재무는 종목이 다양(50여종)하기 때문에 ‘각항정재무(各項呈才舞)’는 많은 정재무를 출 수 있는 능력자를 뜻하며,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은 약간의 정재무를 출 수 있다는 뜻이다. 윤월향의 기록에만 고무를 공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무는 정재종목 중 하나로 윤월향(尹月香)이 여러 정재 중 고무(鼓舞)를 잘 추어서 기예기록에 기록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승무, 병창, 현금(玄琴), 산조, 양금, 가야금 등의 앞에 ‘선(善)’을 붙여 ‘선승무(善僧舞)’ 등으로 표기한 것은 남보다 ‘앞선다’는 뜻으로 우수한 능력자임을 표기한 것이며 ‘특(特)’ 또는 ‘특상(特上)’은 ‘특히 더 잘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또한 산조(酸調)의 한자표기가 오늘날 ‘산조(散調)’ 표기와 다름도 알 수 있다. 그밖에 김매월(金梅月)·박취옥(朴翠玉)·송홍련(宋紅蓮)·안선옥(安鮮玉)·우달경(禹達卿)·우연화(禹蓮花)·이미화(李美花)·조산월(趙山月)·최금란(崔錦蘭)·허금선(許錦仙) 등 10명은 춤 종목 없는 국악종목으로 가야금, 병창, 산조, 가곡, 현금, 양금, 잡가 등과 정자(正字), 초서(草書) 등의 서예도 기록하였다. 이상과 같이 1914년 대구출신 서울에서 활동한 이는 「예단일백인(藝檀一百人)」에 4명과 1918년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의 대구조합의 32 등 35명의 기녀들의 신상명세와 기예능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을 가르친 스승 강태홍(姜太弘,1893~1957)은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후 잠시 경주권번으로 갔다가 대구조합이 대구권번(大邱券番)으로 바뀐 후에 다시 돌아와 가르치다가 울산권번(蔚山券番)을 거쳐 1939년(47세) 동래권번(東萊券番)으로 떠났다. 당시 권번조직에서 교육을 담당한 지도자는 전국적으로 남자 재인(才人)과 창우(娼優)들이 춤과 소리와 악기사범을 맡아 지도했었다. 간혹 재능이 뛰어나나 나이가 많아 물러난 퇴기(退妓)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관리자 역할을 하였다. 재인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게 된 배경은 우선 어려서는 무동(舞童)으로 춤과 소리를 배워 추지만 성장하면서부터는 악사역할로 전환하여 악기연주와 수많은 춤과 소리반주를 하면서 장단변화와 춤동작 전개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지도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지도력이 유명해진 재인들은 큰 고을로 모셔가는 것이 많아져 강태홍도 여러 곳의 권번을 거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부산동래에 정착하여 가르친 가야금산조(강태홍류)는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1989, 보유자 신명숙)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으며, 그 때 부산에서 강태홍의 춤을 배운 제자로는 한순서(강태홍류 춤보존회)와 김온경(부산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보유자, 1993) 등이 있다. 한순서(1941-)의 증언에 따르면 강태홍은 키가 작으나 흰머리에 변화무쌍하고 재주가 많으며 호쾌하고 멋있게 춤과 연기를 하였다 한다. 그래서 가야금도 다양한 기교로 배웠으며, 춤 역시도 다양하고 활기 넘치고 호쾌하게 춤을 추도록 배웠다. 특히 승무의 북가락은 지금의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한순서로 전승된 승무는 재인계통 승무의 특색인 승복을 벗고 떠나는 결말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살풀이춤은 여인의 한과 감정을 담아서 추는 등 "어떤 춤이 됐던 태마가 있게 추어라”라고 하였으며, "극적인 감정을 살려 추어야지 밋밋하게 추는 것은 멋없는 춤이 된다”라고 지도 하였다고 한다. 그밖에도 춤집이 크고 호쾌한 영남 덧배기가락이 물씬 밴 소고입춤, 장고춤, 바라춤, 화관무, 초립동, 봄타령, 도라지, 꼭두각시 등을 전수받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00년대 초기 대구지역춤을 전승하며 이끌었던 무용인물로는 강태홍을 대표로 꼽을 수 있고 그의 지도를 받은 대구조합과 대구권번의 35명의 기녀들에 대한 자료의 편린(片鱗)이나마 반가운 일이며 아직은 증언자 있어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강태홍은 대구를 일직 떠나 전승력을 잃었는지 대구 전승자가 어딘가에 있는지는 조사연구할 시간이 부족하여 알 수 없다. 혹시나 대구에서 근거자료가 나와 주기를 바랄 뿐이다. 3. 박지홍의 전승인맥: 박지홍→ 최희선(달성권번), 권명화(대동권번)근대의 여명기인 1911년에 대구조합과 뒤를 이은 대구권번의 악가무 지도사범으로 초빙되어 지도하던 강태홍이 떠나고 뒤를 이어 1920년대 후반 지도자로 초빙된 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박지홍(朴枝洪, 1884,1889?-1958,1959?)이었다. 박지홍은 서편제의 대가 김창환(1854-1939)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우고 사촌형님뻘인 박기홍에게 소리 더늠을 이어받으며 수행고수를 하다가 대구로 이주하였다. 건장한 체격에 미남으로 「심청가」와 「흥보가」를 잘하였다. 박귀희(朴貴姬)가 그에게서 판소리와 단가(短歌)를 배웠고, 박초향(朴初香)이 그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 「흥보가」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대구기생조합(대구권번), 달성권번과 대동권번 세 곳이 있었다.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은 대구시 중구 상서동에 소재해 있었고, 해방 후 대동권번은 1940년 전후로 설립되어 대구역 교동시장 근처에 있었다. 이때 달성권번에서 가무를 가르친 사람은 박지홍 외에 채승호(채찬복의 형)가 있었다. 달성권번에서는 춤, 시조, 가곡, 창 등을 공통적으로 익히도록 하였다.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고, 박녹주가 판소리와 춤을 지도했다. 특히 춤에 특출한 기생들은 따로 입춤, 검무, 살풀이춤, 승무 등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대동권번 역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한편 해방 이후 나주에서 온 살풀이의 대가 박지홍(朴枝洪)에 의해 중구 교동(교동상가백화점 자리)에서 사설 대동권번(이후 남산동에 경북국악원 개설)이 생겨 대구지역에 전통음악교육의 맥을 이어나갔다. 아울러 달성공원 주위와 서문시장 등 사람들이 밀집한 곳에 사설 기생교육단체가 여러 곳 생겨 대구지역 전통음악을 유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대구지역 전통음악예술의 원천은 일제강점기 대구기생조합을 비롯한 대구권번과 달성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광복 후 대구의 대동권번에서 ‘기생들의 시험’을 실시하여 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광복 후 두 번째의 기생시험을 1948년 9월에 실시하여 응모자 84명 중 60여 명이 합격되었다고 한다.이와 같이 가무를 하려는 기생이 되려면 이 권번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고, 그들이 3년간 수업을 받으면 요정을 출입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았다. 수업과목은 춤·시조·풍류·가야금병창 등이었다. 소리·춤·기악 등 악가무를 동시에 지닌 박기홍에서 박지홍으로 이어지는 달성권번, 대동권번의 춤이 대구지역 권번춤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음은 의미로운 사실이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희선은 1929년 대구출생(2010.10.12. 작고)으로 10세 후반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우며 무용계에 입문하여,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고, 한영숙에게 전통춤 사사하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배우고 청구대학에서 공부하며 무용 활동을 하였다. 예그린악단 무용부장이었던 그녀는 1957년 제 1회 최희선 무용발표회를 시작으로 1958년 청구대학 강당에서, 1959년에는 서울국립극장에서 『승무』, 『부채춤』, 『화랑무』, 『장고춤』 등의 한국무용을 선보였다. 권명화는 1934년 경북 김천출생으로 6.25전쟁 중 피난간 대구에서 절집의 풍악소리에 사로잡혀 영남 최고의 풍류객 박지홍을 만나 1950년부터 사사 받고, 그에게서 배운지 6개월 만에 대구극장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박지홍 고전무용학원 강사가 되었다. 일제의 관할에 있었던 만큼 크게 번성하였던 달성권번은 해방이 되면서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대동권번은 해방 후에도 얼마간 존속되어 오다가 1950년 화재로 인해 없어졌다고 전한다. 박지홍이 운영하는 대동권번은 그해 남산동 포구당(포교당) 폐기된 절을 기녀와 회원들이 모은 돈으로 임대하여 ‘경북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권번의 역할을 대신하였는데 이때 김천에서 6·25한국동란으로 피난해온 권명화 가족이 피난하여 세든 집이 박지홍의 경북국악원 이웃집이어서 담너머로 연습하는 악가무를 보고 따라 흉내 내다가 용기를 내어 직접 찾아가 입회를 하여 전수를 받았다. 권명화가 전승하고 있는 춤은 승무, 살풀이춤(대구시무형문화재 제9호), 입춤, 소고춤, 검무 등과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의 여원무를 비롯하여 단오굿 일곱거리의 부정굿춤, 산신축원굿춤, 천왕굿춤, 칠성굿춤, 대감굿춤, 장군굿춤, 대신굿춤, 해원굿춤이 있고, 축원춤으로 산거리춤(방울과 부채), 지전춤, 선비춤(한량무), 바라춤, 선녀춤, 오방신장춤, 장군칼춤 등이 있으며 건들바위 치성굿’도 복원하여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91년, 여수)에 출품한 적도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지역의 무대 예능화 된 전통춤은 박지홍을 정점으로 한 달성권번, 대동권번 등 두 개의 권번을 통해 전승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말 궁중 여령춤을 계승하고 있는 정소산(1898-1975)으로 그 맥이 이어져왔다. 따라서 권번이나 기생을 제외하고는 대구지역 전통춤의 역사적 맥락을 말하기란 어렵다. 박지홍은 대구에서 계속 연구소를 운영하였는데, 1958년 제1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경북 대표로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제1회 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공연한 작품은 쾌지나칭칭나네, 하회별신굿, 경산옹헤야, 함창모내기놀이, 안동놋다리였다. 당시의 출연진은 신장대에 박지홍, 먹중과 분네에 최희선, 초랭이에 김경자, 양반에 채승호, 선비에 채찬복 등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 당시의 제일 극장에서 앵콜 공연을 준비하다가 장구채를 잡은 채로 과로로 쓰러져 며칠간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다 마침내 운명하였다. 이 시기의 대구의 전통춤은 기방춤으로 일컬어지는 박지홍류와 궁중무인 정소산류로 크게 대별됨을 알 수 있다.4. 김상규의 전승인맥: 김상규→최영자, 이숙재, 주연희, 서진은 등 대구에서 현대무용이 시작된 시기는 1930년대로 볼 수 있다. 일본의 현대무용 개척자인 이시이바쿠(石井幕)는 우리나라에서도 현대무용의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시이 뒤를 이어서 최승희, 조택원, 조용자, 김상규, 김한일, 장추화, 박용호 등 많은 한국의 무용가들이 활약하였다. 대구에서의 현대무용 공연은 1935년 최승희가 대구 공회당에서 한 것이 효시였고, 1936년에 조택원이 같은 장소에서 도불(渡佛)고별공연을 한 것이 그 다음이었다. 중국에서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한 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이시이가 귀국도중 대구에 들러 1944년 7월 하순에 대구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였다. 같은 해 최승희와 조택원도 대구공회당에서 무용공연을 가졌으며, 8.15광복 직전에 이시이의 문하생 조용자도 대구 공회당에서 발표를 가진 바 있다. 그는 1947년 현재의 대봉동 전신전화국 자리에 대구 최초로 무용연구소를 차려 활동하였다. 해방 된 이듬해인 1946년에는 발레를 전공한 한동인과 정지수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했고, 그 해 가을 장추화, 이석예도 발표회를 가졌다. 1947년에는 이시이 문하생인 박용호와 조용자의 무용공연이 만경관과 키네마에서 있었다. 또한 경북여고를 졸업한 뒤에 신성무용소를 열어 후학을 지도 한 김선화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대구여중 무용교사였던 하복조와 경북여고 무용교사였던 주연희가 찬조출연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지금의 대구 현대무용을 존속케 하는 역사적 효시에는 김상규(金湘圭, 예명 技波, 1922-1989)가 있었다. 김상규는 1922년 5월 25일, 경북 군위군 군위면 금구동 134번지에서 안동 김씨 집안의 부농한 아버지 김병호(金怲鎬)와 어머니 정직영(鄭稷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상규는 누나인 김무숙이 태어나고 5년 만에 낳은 자식이어서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어릴 때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했으며 한 번은 엿장수가 "엿 사시오?”하며 가위를 "쨍강쨍강” 치자 동생(상규)이 "거기에 맞춰 춤추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누나 김무숙이 말하였다. 또 마을에 남사당패 거리나 서커스단의 공연이 오면 하루도 빠짐없이 구경하며, 이들이 떠날 때면 동네 어귀 멀리까지 따라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성대다가 울면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김상규의 마음속 우상은 연희패들이었고 자신도 언젠가는 이들과 같은 연희패가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대구로 유학하여 수창초등학교를 다닐 당시 1931년 9월16일 대구극장에서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무용에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법학공부해서 판검사 돼서 오겠다고 핑계를 대고 14세(1935)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 이시이바쿠 연구소에 가서 신무용을 배웠으며, 동경전기학교(현 대학승격)를 졸업한 뒤 1941년 와세다대학 문학부와 1943년 동경음악과를 수학해 다방면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1946년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예능분야에 뛰어난 김상규는 영화, 연극, 음악, 회화부문까지 다방면에 재능이 있어 골고루 습득하였다. 농촌의 자연미와 순박성, 넉넉함의 감수성은 무용가로 활동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성들도 사회적 인식을 깨기 힘든 시절에 남성무용수로 향토 대구의 현대무용을 개척하고 뿌리 내리게 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김상규는 조택원, 최승희, 이시이 등의 공연을 보고 무용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판검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에서 다년간 수련을 하고, 대구로 돌아와 신무용 보급을 한 인물이었다. 1945년 8.15광복이후 정치적 혼란기를 거친 다음 대구무용계도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김상규는 1946년 귀국 후 바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1949년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하고 만경관에서 가진 그의 ‘김상규 신무용 발표회’라는 타이틀의 첫 발표회에는 최희선, 최미연, 박근숙 등 20여 명이 출연하였으며, 이는 대구지역에서 자생한 신무용의 첫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1950년 7월에는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총구국대가 결성되어 김상규가 무용분과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 무렵 문하생으로는 김화심, 최영자, 문명희, 이빈화, 박득남, 김경자, 주연희, 박득순, 장성자, 박근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얼마 후 문총구국대 경북지대는 해체되고 1951년 12월 19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가 발족되었으며, 무용위원장은 김상규가 맡았다. 1951년부터 김상규 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키네마극장, 현 한일극장, 전쟁 중에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옮겨짐)에서 자주 열렸고, 이때의 출연자들로는 이월영, 최미연, 이빈화, 최영자, 한순옥, 장일, 문영희, 백운향, 박득남, 박득순 등이 있었고, 김경자, 이숙재, 백년욱 등이 어린나이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김상규는 전쟁이라는 혼란과 모든 공연운영비를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1952년 4월 14일에서 15일(오후 1시, 7시)까지 대구문화극장에서 제2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휴전될 무렵인 1953년 6월 4일에서 6일(오후 1시,3시 30분,7시)까지는 전쟁 때문에 대구로 무대를 옮겼던 중앙국립극장(현 한일극장)에서 제3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했다. 뚜렷한 연습장 하나 없이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또는 옥상 등을 이용하여 연습하였으며 미제 내의를 검정으로 물들여 연습복으로 입고, 제대로 된 무용화 없이 맨발로 시멘트 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하였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연습과정을 거친 후 공연을 하기 위해서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 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중이 몰려 들었음에도 그 경비를 충당하기 어려워 무용가와 무용가를 둔 집안은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김상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품 발표회를 해마다 열다 보니 논밭을 팔게 되고 결국은 집까지 팔게 되어 셋방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활형편은 어려워도 대구에서 인정받는 향토계의 춤꾼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대구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남성무용수로 작품세계는 끝없이 폭을 넓혔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춤을 사랑하고 향토계에 예술세계의 밑거름이 되도록 터전을 닦았다. 1956년 이후의 대구무용계는 여전히 김상규의 독무대였다. 김상규는 1951년 제1회 김상규 무용발표회를 가진 이후 1955년 제5회, 1957년 제 6회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김상규 문하생이었던 김상아, 구숙자, 주연희, 장성자, 서차애 등이 키네마에서 열린 제 6회 김상규 무용발표회에 출연하였다. 개인발표회가 없었던 1956년에도 경북예술제에 찬조출연하여 『아뜨리에의 환상』, 『성당의 아침』등 화려한 무용의 향연을 베풀었다. 김상규는 무용인으로는 처음으로 1957년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혈육으로는 대구 가톨릭대 무용학과 교수 김소라가 있으며, 1989년 작고할 때까지 100여편의 작품을 안무하였다. 손꼽히는 제자로는 최영자, 백운향, 박덕남, 박덕순, 백년욱, 이숙재, 김상아, 주연희, 서진은, 장성자, 오애리, 정선자, 김예숙, 이명주, 박성실, 김미연 등이 있다. 김상규의 작품세계는 첫째, 자신의 삶과 주변을 투영시켜 만든 작품으로는 「동심」,「처녀총각」,「애기와 어른」,「형제」,「명상」,「봄노리」,「젊은 날의 추억」,「봄처녀」,「파동」,「새싹」,「무영탑」,「파랑새」,「악몽」,「마음의 생태」,「망상」,「환희」,「월야」,「춘일서정」,「휴식의 환각」,「길손」,「목선」,「소녀시절」,「사의 유혹」,「화염」,「희망의 언덕」,「들국화 피는 시절」,「나그네」,「잃어버린 마음」,「가면무」,「고혼」,「애상곡」,「사슬을 끊고」,「가을의 회상시곡」,「의용」,「가로등」,「건망증」,「완행열차」,「기억을 기다리는 거울」,「은방울」,「초원의 동심」,「지평선」,「개구리의 합창」,「산소결핍」,「고목의 노래」,「수련」,「원색의 회량」,「가면의 생태」,「장미의 꿈」,「푸른 언덕」,「타임」,「작품B」 등이 있고, 둘째, 우리 전통적인 문화와 겨레의 민족성을 다룬 작품으로는 「활양」,「아리랑 삼조」,「황진이」,「향토의 인상」,「태공망」,「살풀이舞」,「건설」,「전설의 환상」,「마음의 생태」,「힘」,「호걸무인」,「검무」,「희생」,「기원」,「유상무상」,「순국의 처녀」,「백홍」,「타령조」,「산소결핍」,「이 흙이 있는 한 절망은 없다」,「수련」,「민족의 흥」,「전진」,「회귀」,「산하」등이 있으며, 셋째, 삶 자체를 불교에 의지해 온 평소의 모습과 심오한 종교관과 사상을 다룬 작품으로는,「창조의 신」,「정불국토」,「무영탑」,「기원」,「유상무상」,「탈속」,「남방의 서정」,「성당의 아침」,「재생」,「아잔타의 꿈」,「관음보살」,「보리수」,「생명의 향연」,「휘데아스의 꿈」,「니르바나」,「원색의 회량」,「간다라의 벽화」,「정각」등 1949년부터 1976년까지 13회에 걸쳐 100여 편을 발표하였다. 그가 30년 이상을 향토 무용계에 독보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주변의 시선에 어려운 점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무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시절부터 여성도 아닌 남성이 무용계에 뛰어들어 지역무용계에 토양을 이루어 낸 공은 인정받아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5. 정막(정순영)과 김기전의 전승인맥 김상규와 별도로 대구 현대무용의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는 정막(鄭漠, 본명 鄭淳永, 1928-2012)과 김기전(金起田, 1935-) 부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 무용교육에 뜻을 두고 원화여고에서 정막 무용연구소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정막은 1947년 겨울, 서울 명동의 문교부 인가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 교육 무용연구소에 첫 발을 디딘 것이 무용예술의 입문이었고, 6.25사변을 통해 무용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현학선이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 그해 8·15경축무용제에 중앙국립극장(전쟁으로 대구이전)에서 송범, 김진걸, 이인범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54년에 중앙국립극장(대구)에서 정막의 안무로 제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김기전은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1940년 여섯살 때 고향인 함경남도로 돌아갔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부산으로 피난 가서 경남여고와 부산대에서 공부하고 경기여대를 수료했다. 어린 시절부터 무용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발표회 무대에 자주 섰다. 피난시절 이인범발레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52년 임천수 국보오페라단에 1954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7월 육군 군예대(KAS)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등을 이용하여 연습을 했고, 미제 내의를 검정색으로 물들여 입고 다시 변형시켜 한번 더 입고, 3번은 활용했다.”며 당시의 열악했던 연습과정을 피력하고 있다. 1958년 12월에는 경북무용협회가 결성되어 키네마에서 창립공연을 하였는데, 정소산, 정막, 최희선, 현학선, 박금슬, 문소조 등이 출연하였다. 이 단체는 경북문화단체 총 연합회로 흡수되었다. 현학선도 이때 처녀무용발표회를 가져 향토무용계를 고무시켰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부인 김기전과 대구지역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춤인재를 양성하였다. 김기전은 국내 최초로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하여 초대(1981~1988년) 안무자로 대구 현대무용계를 직업무용단으로 이끌어왔다. 정막은 춤 실연자이자 춤 연출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 교육자, 이론가, 평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였다. 2000년에 이르러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 향상에 매진해온 일은 중앙중심의 무용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무용공연에 관계되는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으나 그 경비를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따라서 재정적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춤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무용가들이 세인의 눈총을 받으며 춤을 춘 배고픔 속에서도 민족혼을 고취시키고 춤 예술의 지평을 여는 창작 무용들을 계속 발표하였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좋은 환경의 무용세계를 후배 무용가들에게 물려주게 된 계기가 마련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Ⅳ. 결언- 근대전기 대구지역춤의 인맥적 특징과 의의 근대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 1960년 이전 대구지역춤의 전승인맥을 고찰하면서 살펴본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정소산, 강태홍, 박지홍, 김상규 등 춤 명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구지역춤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여‘춤의 고장을 수립’하였다. 대구인들의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개척정신은 근대 혼돈의 역사 속에서도 대구의 전통적 춤기반을 이어받아 전승하였고 새로운 현대춤도 정착시켜나갔다. 2) 각자 독자적인 춤정신과 다양한 춤방식으로 대구춤을 범한국적이고 세계적인‘안무도시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대구지역 전통춤의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역춤의 유입전승, 궁중춤을 민속춤으로 이동한 계층전승, 외래전승, 창조전승 등의 각자 다양한 전승원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대구지역 전통춤(교방 및 기방춤, 민간춤, 종교의식춤)을 꾸준히 계승한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방무용인(박지홍, 강태홍)들을 초청하여 대구 전통춤으로 정착시킨 유입전승, 수준높은 궁중춤을 대구민속춤으로 정착(정소산)시킨 계층전승, 국제무대로 진출하여 현대춤을 세계적인 현대춤 도시(김상규)로 도약시킨 외래전승, 근현대 무용가들의 창작정신으로 대구현대춤(김상규, 정막, 김기전)을 발전시킨 창조정신 등으로 대구춤계를 주도하였으며 후대에 대구출신 무용가들이 경향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3) 대구감영과 대구부 예기(藝妓)들의 뿌리깊은 교방춤과 전통춤 등‘역사춤의 혈통 계승’으로 근대춤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이바지하였다.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736)(1768),『경상도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보이는 대구예기들의 교방춤과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까지 이어진 예기들의 후예의 피가 흐르고 있다. 4) 6·25동란으로 북한지방과 수도권 피난민이 대구로 집결하였고 임시 중앙국립극장 설립으로 ‘춤공연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당대 최고급 명무공연과 춤인적 교류가 활발하였다. 5) 대구지역춤에는 영남춤의 보편적 특징, 영남북부춤의 중심적 특징, 대구의 향토춤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영남춤의 요람(메카)’으로 발돋음하였다. 민간전승의 민속춤은 오랜 역사속에 뿌리내리며 정착된 전통문화이기에 생태적으로 영남권춤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불어 영남북부권의 거점도시로 영남남부와 다른 영남북부권춤의 특성도 지니고, 대구만의 향토춤도 여전히 전승되어 왔다.결국 대구는 근원적으로 한국전통춤 중에서 광역적인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면서 대구만의 지역민속춤의 특색을 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일제강점과 서구문화의 홍수와 6·25 한국동란으로 인한 대구집중화 현상 등 급변하는 역사와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대구지역춤은 지역화, 탈지역화, 범한국화, 중심화, 국제화 등으로 중앙무대와의 교류가 활달하게 전개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20세기 근대전기의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나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도 있다. 물론 한국근대사의 범국가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1960년 이전의 한국사회는 근대춤의 ‘여명기’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혼란기’이며 ‘전란기’이기에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전통문화의 ‘쇠퇴기’이며 외래문화의 ‘범람기’의 시련을 겪었다. 따라서 대구춤 역시 비켜갈 수 없는 운명으로 현란했던 관아의 교방춤과 권번춤은 역사의 뒤안길(박지홍, 정소산)로 접어들어 몇몇 춤꾼(최희선, 권명화, 백년욱 등)과 몇 가지 춤만이 명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었다. 시대조류에 따라 한국춤은 전통춤과 창작춤을 동시에 표현하는 어려움에서도 꿋꿋이 맥(백년욱, 주연희 등)을 이어 왔다. 현대춤과 발레는 대구(김상규, 최원경, 김기전, 구본숙)는 물론 서울 등지로 진출(이숙재, 김복희, 박인숙, 백현순, 이화석, 김용철, 손윤숙)하여‘춤의 고장’의 토양에서 성장하여 대구출신다운 유명 무용가들도 많은 점 또한 이를 반증하는 것들이다. 이제 많은 중견무용가들(박연진, 임혜자, 이정일, 김현옥, 장유경, 김희숙, 박현옥, 김소라, 강정선, 김죽엽, 최두혁, 오레지나, 채명)과 수많은 신진무용가들(김순주, 김나영, 김명란, 김현태, 김희경, 노진환, 박미향, 박정희, 박종수, 변인숙, 안지혜, 우혜영, 유연아, 이경화, 이수연, 이승대, 장 오, 장현희, 장혜린, 전효진, 조은희, 최석민, 최윤영, 추현주, 편봉하)등이 대를 이어 대구춤의 정신과 전성기를 향해 매진하고 있어 밝은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고 본다.(대구세계안무페스티벌 세미나에서 발제된 원고) ) 참고문헌 계명대 한국학연구소(2011). 영남의 지역예술연구.金宅圭·朴大鉉 編譯(1997). 大丘邑誌, 대구광역시.김영희(2006). 개화기대중예술의 꽃, 기생, 민속원.김죽엽(2010). 정소산의 작품활동을 통한 무용사적 고찰: 대구활동을 중심으로, 영남 악가무 재조명, 서울:한국국악학회.김죽엽(2011),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정재가 대구무용사에 끼친 영향, 음악문헌학, Vol.- No.2, 한국음악문헌학회.김죽엽(2013).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존재적 가치인식론, 한국무용학회 13권 2호.김채현·김영희·이종숙·김채원·조경아(2015,). 한국춤통사, 보고사.김천흥(2005). 우리춤이야기, 민속원.노동은(1995). 한국근대음악사1, 한길사.대구시사편찬위원회(1995). 대구시사. 대구시.대구예총(2012). 대구예총50년사. 대구: 동연합회.박민우(2013), 김상규 생애를 통한 무용사적 고찰,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석사학위 논문.박성실(1997), 韓國近代舞踊史에 나타난 金湘圭의 춤 硏究 : 敎育者的 成長科程을 中心으로, 中央大學校 大學院.박연진·장유경(1993). 대구 한국무용 30년사, 한국무용연구 11집, 한국무용연구회.박연진·장유경(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박황(1974). 판소리소사. 신구문화사.배연형(2011). 한국유성기음반 : 1907-1945, 권5. 한걸음 더.손태룡(2001). 每日申報音樂記事總索引:1910.5.30.-1945.8.15. 民俗苑.손태룡(2005). 달성권번의 음악사학적 조명, 향토문화 제20 특집호, 대구향토문화연구소.손태룡(2012). 대구지역의 기생단체 연구, 한국학논집 46,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송기영(2011). 정소산의 예술 활동이 대구 근대 무용사에 끼친 영향, 모드니 예술 5집,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송방송(2003). 京城放送局에 출연한 藝妓의 공연활동, 한국근대음악사연구, 민속원.송방송(2007). 증보한국음악통사, 서울: 민속원.宋芳松(2012). 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송방송·이진원(2007).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 민속원.안제승(1984). 한국신무용사, 승리문화사.윤미라(2000). 대구 달구벌 입춤의 전승과 변형에 관한 연구, 대한무용학회 제28호.윤현숙(2007). 대구지역 무용의 흐름에 관한 연구,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이규리(2004). 朝鮮後期 外方官妓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이병옥(2011). 영남춤의 생태민속학적 고찰, 한국무용연구, 29권 2호, 한국무용연구학회,이병옥(2013). 한국 전통춤의 분류와 양식적 특징: 정병호의 분류법 검토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27권.이숙영(1995). 지역문화 예술로서 현대무용의 활성화 방안 : 광주,대구,부산 지역 공연관람자를 중심으로.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이숙재(1999). 技波 金湘圭 삶과 예술, 그리고 작품세계의 재조명, 한국 근대춤 인물사(1), 송수남 엮음, 현대미학사.이은주(2007). 춤 33인, 푸른미디어.정순영(2013). 대구춤 60년사, 사단법인 다다.주연희·구본숙(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채명·박정희(2010). 춤신을 만나다 권명화, 대구동구팔공문화원.채희완(2013). 춤창작과 비평에 예술공학 시스템을 도입함, 대구춤 60년사, 정순영 저, 사단법인 다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8). 한국유성기음반총목록. 민속원.錄音文獻學會(昭和11). レコド文化發達史.<광무대(光武臺)>(한겨레음악대사전, 2012.11.2. 도서출판 보고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48646&cid=42607&categoryId=42607.<한국근대의 음악원형>(http://music.culturecontent.com) 참조.<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대정권번(大正券番)>(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지방의 권번>(기생 이야기-일제시대의 대중스타, 2007. 7. 5, ㈜살림출판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073&cid=42967&categoryId=42967.<조선 기생>, 연예인이 되다 – 역사채널e 2016.06.14. http://blog.naver.com/eunayoon715/220725445504.『매일신문』. 1958.8.10.『동아일보』. 1958.8.13.『매일신문』. 1958.8.9., 9.1.『매일신보』. 1972.11. 16.『매일신보』. 1914.1.28.-6.11.『대구시보』. 1948.9.23.월간 대구문화. 2007.4월호.이생강 면담, 2013, 면담자: 김죽엽.한순서 전화면담, 2016.7.13. 면담자 : 이병옥.한순서 면담, 2010~2013, 장소: 강태홍춤연구소, 면담자: 이병옥.권명화 전화면담, 2016.7.16.~18(3회), 면담자: 이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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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한국의 지역춤, 대구·경북지역의 춤지리와 기후환경에 따른 대구·경북인의 기질 대구·경북지역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남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루고 있어 분지 내부의 복사열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해 심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자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라는 신조어를 쓸 정도로 무더운 날이 많다. 그리하여 대구·경북인들은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개척정신, 의리와 결단력을 중시하며 이러한 생태환경적 배경으로 대구·경북지역만의 독특한 춤문화를 형성하여 발전시켜왔다. 신라 천년의 문화적 배경과 춤전승 대구·경북지역은 역사적으로 서라벌(경주)을 도읍지로 시작해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약 1천 년 동안 행정, 산업,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전통적으로 보수성과 선비정신이 높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행정의 중심이 송도(개성)와 한양(서울)로 옮겨진 고려와 조선시대까지도 영남호족의 세력이 여전히 핵심을 유지하면서 오늘날까지 ‘선비(양반)정신’이 깃들어 있는 독특한 지역춤의 특성을 전승하여왔다. 신라시대 악성(樂聖) 우륵이 가야금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는 가야지무(伽倻之舞), 한기무(韓岐舞), 미지무(美知舞), 대금무(?琴舞)가 있었고, 계고(階古)에게는 가야금을, 법지(法知)에게는 노래를, 만덕(萬德)에게는 춤을 각각 가르쳤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전한다. 뿐만 아니라 황창무(黃昌舞)와 처용무(處容舞), 상염무(霜髥舞), 무애무(無?舞), 오기(五伎) 등 남성춤도 많았다. 그밖에도 도솔가무(兜率歌舞), 회소곡(會蘇曲), 그리고 팔관회와 연등회에서 가무백희(歌舞百戱) 등 민간생활과 밀접한 춤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경상감영의 관기와 권번춤 전승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대구지역에 감영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경주와 상주로 이어져 온 경상감영이 1601년(선조34년)에 대구로 이전하게 되면서 경상도의 중심적 거점도시로 변모되면서 국가와 지역적 행사가 많아졌다. 경상감영(지금의 중구 포정동 경상감영공원 일대)과 대구부(大邱府)에 소속된 관기(官妓)들의 악가무 활동이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736년,영조 43년),『대구읍지大丘邑誌』(1768년 발간), 『경상도 읍지』(1832년경), 『영남읍지』(1871년경,1895년),『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1888) 등> 그러나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부터 실질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이 사회로 진출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모임이 1910년 5월에 결성한 ‘대구기생조합’이다. 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수록된 예인 100인 중에는 대구출신으로 조산월(趙山月), 옥화(玉花), 향심(香心), 설경패(薛瓊佩) 등 4명이 대구기생조합이나 서울로 진출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 지송욱(池松旭) 편저)에는 조선 예기 611명 중 대구조합(大邱組合) 소속 32명, 김천조합 소속이 3명이나 기록되어 있고, 고무(鼓舞), 승무, 각항(各項)정재무, 검무, 남무 등을 잘 추었다고 하였다. 1922년부터 ‘대구권번’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1927년 ‘달성권번’이 새로 설립되었다. 무형문화재 종목의 연희와 춤들 대구·경북지역이 고대부터 근대까지 영남지역의 중심지였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제침탈의 거점인 부산·경남지역이 중심도시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유교와 양반문화를 비롯한 예술문화는 여전히 대구·경북지역에 뿌리 깊게 남아있었다.농악영남지역 농악이 다른 지역 농악과 가장 큰 차이는 시각적으로 엄청나게 큰 고깔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영남북부권이 남부권보다 더 큰 고깔을 쓰는 경향을 보이며, 판굿도 발달하여 7종목(고산, 욱수, 청도차산, 금릉, 비산(날뫼), 구미무을, 경산보인)이나 지정되어 있다. 그 특징은 원박적이고 아주 빠른 리듬과 웅장한 북춤과 화려한 고깔춤이 발달했으며, 천왕매기굿(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굿)이나 지신밟기에서 잡귀잡신을 쫓는 힘찬 덧배기가락과 덧배기춤이 발달했으며, 개인놀이보다 집단놀이와 뒤풀이춤이 발달했다. 고산농악(대구 1호)은 농기구를 앞세우고 태극무늬로 도는 덩덕궁이, 원을 돌며 각자 춤추는 춤굿, 손잡고 원을 돌면서 닭을 쫓는 닭쫓기, 나선형(螺旋形)으로 들어갔다 풀어 나오는 방석말이 등이 특징이다. 욱수농악(대구 3호)은 동제당 앞에서 신내림을 받는 천왕받이굿과 원형으로 춤을 추는 둥글데미, 세로 2줄로 마주보고 앉은 연주자들을 상쇠가 Z형으로 빠르게 돌면서 징·북·장구·법고 열로 끊어 일으켜 풀어나가는 외따기와 흥겨운 어깨춤을 추는 덧배기춤 등이 특징이다. 청도차산농악(경북 4호)은 천왕기(天王旗)싸움에서 발달한 농악으로 꿋꿋하고 향토적인 옛스러움과 질박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장단을 외가락으로 빨리 몰아가는 경우가 많아 소박하고 씩씩한 느낌을 준다. 금릉빗내농악(경북 8호)은 마을의 성황제와 풍년을 기원하는 별신제(別神祭)가 섞여진 동제(洞祭)의 형태로 진풀이 농악과 무당굿과 줄다리기 등이 혼합되어 가락이 매우 강렬하고 종류도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날뫼북춤(대구 2호)은 대구비산농악에서 북을 연주악기로 추는 북춤만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특유의 덧배기가락(굿거리장단)에 맞추어 덩덕궁이, 자반득이(반직굿), 엎어빼기, 다드래기, 허허굿, 모듬굿, 살풀이굿, 덧배기춤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미무을농악(경북 40호)은 쇠와 소고는 전원이 전립에 상모를 쓰고 이외에 배역들은 모두 백색의 큰 고깔을 쓰는데, 고깔의 꽃송이들은 춤사위에 따라 움직이게 한다. 길굿가락과 정적궁가락, 덧배기가락 등 경상도 특유의 쇠가락이 발달하였다. 경산보인농악(경북 41호)은 전형적인 모의농사굿 형식이면서도 다른 지역과 달리 글자놀이가 발달하였고, 섬세한 덩덕궁 가락과 삼채가락이 조화를 이루고, 특유의 별다드래기장단과 덧뵈기장단이 가락의 주를 이루어 화려하고 웅장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탈춤탈춤은 부산·경남지역 낙동강 하류에 7종목(야류·오광대)이나 국가 또는 지방무형문화재가 지정되었고 연희적인 면이 발달했으나, 대구·경북지역은 별신굿놀이 성격으로 재담이 적고 연희보다 의식성이 많은 하회별신굿탈놀음(국가 69호)과 예천청단놀음(경북 42호) 2종의 탈춤이 전승되고 있을 뿐이다. 별신굿이란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서낭)님에게 마을의 평화와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굿을 말하며, 더불어 수호신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탈춤을 추었다. 하회별신굿탈놀음의 탈은 고려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1964년 하회탈 및 병산탈(10종11개)로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탈놀음의 반주는 꽹과리 중심의 풍물꾼이 하며 즉흥적이고 일상적인 동작에 약간의 율동을 섞은 춤사위로 이루어지는데 우리나라 탈춤의 기원과 전승을 밝히는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예천청단놀음은 대구·경북지역의 향토성을 보이면서 벽사진경을 추구하는 주술성과 상류층에 대한 풍자를 투박한 춤과 몸짓, 토속적인 가락에 실어서 전달하고 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키로 만든 큰 탈이 쓰인다는 점, 신령스런 동물이 부정을 물리치는 듯이 하는 동작과 춤에 커다란 부채모양의 주지판이 사용된다는 점 등의 특징을 지닌다. 소리춤안동놋다리밟기(경북 7호)는 안동지방에서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여성들만의 민속놀이로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공주를 데리고 안동으로 피난을 와 개울을 건널 때 마을의 부녀자들이 허리를 굽혀 다리를 놓았다는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놋다리밟기는 맨 앞에 노년부터 젊은 부녀자 순으로 수십 명의 여자들이 모두 허리를 굽혀 앞사람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고, 머리는 앞사람의 궁둥이 왼편에 대는데 마치 생선을 꿰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시녀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공주가 등(다리 역할) 위를 밟고 지나가면 밑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 행렬 맨 앞에 구부려 다리는 그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안동놋다리밟기는 모든 여성이 한데 모여서 노래를 부르며 즐기는 규모가 큰 향토오락으로 승부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소리춤으로 호남의 진도 해남 등지에 강강술래가 있다면, 영덕지역에는 월월이청청(비지정)이 있다. 노래와 춤놀이에는 달람세, 절구세, 둥둥데미, 실감기 등의 소리춤이 전한다. 근대 춤 전승 인맥 1950년 6.25한국전쟁으로 부산·대구지역만 남게 된 정부는 일시적이나마 대구에 중앙국립극장(현재 대구 CGV한일극장으로 재건축)을 지정하여 수많은 예술인과 무용들의 공연이 집중되는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정소산 → 백년욱(대구 18호)정소산(호 小山, 본명 鄭柳色, 1904~1978)은 1900년대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서 궁중춤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보존하며 대구교방춤의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정소산은 대구출생으로 대구기생조합에서 김수희 조합장의 춤을 배운 후 17세(1921)에는 서울 대정권번에서 하규일(1867-1937)로부터 1923년 19세에 본격적으로 궁중춤을 배웠고, 1925년 23세 때에는 조선권번에 있던 대가 한성준(1874~1942)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조선미인보감』(1918)에 보면 "예쁜(좋은) 이마와 발을 가졌으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하는 특징이 소개되고 있으며 부드럽고 착한 성품으로 처음 보아도 구면에 본 것 같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 정소산의 인물과 성품을 묘사했다. 그리고 1926년 이후 고향 대구로 돌아와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가야금을 비롯한 춘앵무, 포구락 등 궁중정재와 살풀이춤, 승무, 장고, 법무 등을 가르쳤다. 제자 백연욱은 1955년 열 살이 되던 해 정소산의 문하에 들어가 스승이 타계할 때까지 함께하면서 정소산의 춤 세계를 체득했으며,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제18호 정소산류 수건춤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이 춤은 궁중춤과 민속춤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의 수건춤으로, 처음 등장하여 먼저 절을 올리고 춤을 추는 궁중춤의 예법과 춤사위가 장중하고 단아하며 절제미가 있는 점이며, 춤이 전개됨이 따라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흥을 돋우는 민속춤의 요소도 함께 담고 있다. 박지홍 → 권명화(대동권번, 대구 9호), 최희선(달성권번)1911년에 대구조합과 뒤를 이은 대구권번의 악가무 지도사범으로 초빙되어 지도하던 강태홍(姜太弘,1893-1957)이 부산 등지로 떠나고 뒤를 이어 1920년대 후반 초빙된 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판소리 명창 박지홍(朴枝洪, 1884,-1958)이었다. 박귀희(朴貴姬), 박초향(朴初香),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등이 판소리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대구기생조합(대구권번), 달성권번과 대동권번 세 곳이 있었다. 이때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에서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다. 1940년 전후로 설립된 대동권번 역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희선(1929~2010)은 10세 후반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웠고,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웠다. 한영숙에게 전통춤을 사사받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다시 배워 달구벌 입춤 명무로 유명하였다. 권명화는 1934년 경북 김천출생으로 6.25전쟁 중 피난간 대구에서 절집의 풍악소리에 사로잡혀 영남 최고의 풍류객 박지홍을 만나 1950년부터 사사받고, 그에게서 배운지 6개월 만에 대구극장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박지홍 고전무용학원 강사가 되었다. 1995년 대구시 무형문화재 제9호 살풀이춤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권명화 살풀이춤의 특징은 수건으로 고(苦)매듭을 엮었다 푸는 살을 푸는 과정이 유일하게 담겨있고 영남교방춤과 덧배기 춤가락이 깃들여 있는 점이다. 그밖에 권명화가 전승하고 있는 춤은 승무, 입춤, 소고춤, 검무 등과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의 여원무를 비롯하여 단오굿 일곱거리의 굿춤이 있고, 축원춤으로 산거리춤(방울과 부채), 지전춤, 선비춤(한량무), 바라춤, 선녀춤, 오방신장춤, 장군칼춤 등이 있으며 건들바위 치성굿’도 복원하였다. 김상규 → 최영자, 이숙재, 주연희, 박성실 등대구 현대무용을 존속케 하는 역사적 인물은 김상규(金湘圭, 예명 技波, 1922-1989)다. 김상규는 1931년 9월16일 대구극장에서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무용에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법학공부로 판검사가 되겠다는 핑계를 대고 14세(1935)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 이시이바쿠 연구소에 가서 신무용을 배웠으며, 1941년 와세다대학 문학부와 1943년 동경음악과를 수학해 다방면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1946년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상규는 1946년 귀국 후 바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1949년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하고 만경관에서 가진 그의 ‘김상규 신무용 발표회’가 대구지역에서 자생한 신무용의 첫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1951년부터 김상규 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키네마극장, 현 한일극장, 전쟁 중에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옮겨짐)에서 자주 열렸다. 이처럼 해마다 작품 발표회를 하다 보니 논밭을 팔고 결국은 집까지 팔게 되어 셋방으로 전전하면서도 춤에 대한 열정은 더욱 높아졌다. 김상규는 무용인으로는 처음으로 1957년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1989년 작고할 때까지 100여 편의 작품을 안무하였다. 손꼽히는 제자로는 최영자, 백운향, 박덕남, 박덕순, 백년욱, 이숙재, 김상아, 주연희, 서진은, 장성자, 오애리, 정선자, 김예숙, 이명주, 박성실, 김미연 등이 있다. 여성들도 사회적 인식을 깨기 힘든 시절에 남성무용가로 대구의 현대무용을 개척하고 뿌리내리게 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정막(정순영)과 김기전김상규와 별도로 대구 현대무용의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는 정막(鄭漠, 본명 鄭淳永, 1928~2012)과 김기전(金起田, 1935~) 부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 무용교육에 뜻을 두고 원화여고에서 정막 무용연구소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정막은 1947년 겨울, 서울 명동의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 교육 무용연구소(문교부 인가)에 첫 발을 디딘 것이 무용예술의 입문이었고, 6.25사변을 통해 무용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으며,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 그해 8·15경축무용제에 중앙국립극장(당시 대구)에서 송범, 김진걸, 이인범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54년 중앙국립극장(대구)에서 정막의 안무로 제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김기전은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1950년 피난시절 이인범발레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52년 임천수 국보오페라단에 1954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7월 육군 군예대(KAS)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8년 12월에는 경북무용협회가 결성되어 키네마에서 창립공연을 하였는데, 정소산, 정막, 최희선, 현학선, 박금슬, 문소조 등이 출연하였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대구지역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춤 인재를 양성하였다. 김기전은 국내 최초로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하여 초대(1981~1988년) 안무자로 대구 현대무용계를 직업무용단으로 이끌어왔다. 정막은 춤 실연자이자 춤 연출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 교육자, 이론가, 평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였다. 2000년에 이르러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 향상에 매진해온 일은 중앙중심의 무용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다. 대구·경북지역의 춤 미래 대구·경북지역이 오랜 역사의 부침(浮沈)속에서도 영남춤의 보편적 특징, 영남 북부춤의 중심적 특징과 더불어 향토춤의 특징을 온전히 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유난히도 춤 신명이 많고 춤추기를 좋아하는 지역의 심성에서 비롯하였다고 본다. 20세기 초기에는 정소산, 강태홍, 박지홍, 김상규 등 춤 명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지역춤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고, 뒤를 이어 20세기 후반에는 최희선, 권명화(대구 9호), 백년욱(대구 18호) 등이 그 명맥을 이어받았다. 현대춤과 발레 역시 끝까지 지역을 지켜 온 김상규(안동대 교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지역출신 무용교수가 많은 것도 근원적으로 춤의 고장이기 때문이지만 김상규가 대학교수로 무용 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대학 무용학과를 개설하고 춤세계를 개척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울로 진출한 이숙재(한양대 명예교수), 김복희(한양대 명예교수), 박인숙(한성대 교수), 백현순(한체대 교수) 등이 ‘춤의 고장’의 토양에서 성장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지역에서도 구본숙(영남대 명예교수), 박연진(대구 가톨릭대 명예교수), 임혜자(계명대 명예교수), 김현옥(계명대 교수), 장유경(계명대 교수), 김희숙(무용가), 박현옥(대구가톨릭대 교수), 김소라(대구가톨릭대 교수), 이화석(대구예술대 교수), 강정선(대구무용협회장), 김죽엽(한국무용가), 최두혁(계명대 교수), 오레지나(대구가톨릭대 교수), 채명(무용평론가), 김용철(섶무용단), 손윤숙(발레) 등과 수많은 무용가들이 대를 이어 대구·경북춤의 정신을 고양하면서 세계를 향해 매진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춤의 인프라는 2015년 이래 매년 세계안무페스티벌(DICFe, Daegu International Choreography Festival)을 펼치며 세계적인 안무도시로 발전하는 초석을 다져 나가고 있다. 이병옥/전통예술 연구가, 용인대 무용학과 명예교수, 무용평론가 용인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로 25년간 재직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다 정년퇴임 종신 명예교수이다. 한국무용사학회와 한국동양예술학회, 한국공연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경기도와 서울 시문화재위원을 거쳐 현재 이북오도청 문화재위원이다. 1985년 객석 예술평론상을 수상, 무용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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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회 전국신인무용경연대회 대상에 변영석대한무용협회는 제60회 전국신인무용경연대회 대상 및 한영숙상 수상자로 한국전통무용 '승무'를 선보인 변영석(단국대)을 선정했다고 10일 밝혔다. 올해 대회 수상자는 지난 7일 서울 양천구 대한민국예술인센터 로운아트홀에서 열린 대회 본선에서 결정됐다. 변영석은 각 부문 금상 수상자 중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둬 올해 대회 최고의 무용수로 선정됐다. 한국무용 창작 남·녀부문 금상 수상자 중 최고 점수를 받은 이에게 주는 송범상은 남자부문에서 '이상, 날개'를 선보인 서상원(성균관대)에게 돌아갔다. 올해는 한국전통명작무 부문 최고 득점자에게 주는 김진걸상이 신설돼 '청풍명월'을 선보인 진서영(숙명여대 대학원)이 수상했다. 부문별 금상 수상자는 아래와 같다. ▲ 한국무용 전통 여자부문 배우진(이화여대 교육대학원) ▲ 한국무용 전통 남자부문 변영석(단국대) ▲ 한국무용 전통명작무 진서영(숙명여대 대학원) ▲ 한국무용 창작 여자부문 문승연(이화여대) ▲ 한국무용 창작 남자부문 서상원(성균관대) ▲ 현대무용 여자부문 장은영(한양대) ▲ 현대무용 남자부문 박용휘(중앙대) ▲ 발레 여자부문 이수연(한예종) ▲ 발레 남자부문 정은성(경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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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 8일 김진옥, 정명자, 박경랑, 3인3색 명무전길라잡이 강신구 / 전통예술평론가 박경랑선생은 어디서든 준비된 곳이라면 멋을 알고 휘어 감는 관능미를 지닌 무용가라 할 수 있다 어릴 적 4세부터 경남 고성에서 외증조 김창후로부터 대를 이어 영남춤의 맥을 올곧이 이어 가고 있다. 부산, 진주시절은 춤 선생 김수악, 김진홍, 동래 권번(捲番)의 마지막 기녀인 강옥남으로 부터 엄격한 규율과 강한 성품으로 무용 수업을 받아 오늘날 든든한 교방청춤 전승자로 지켜 온 분이다. 교방청춤, 교방소반춤, 교방승화무(敎坊僧花舞), 교방검화무(敎坊劍花舞), 교방건무(敎坊巾舞) 등, 문화재 지정종목에 가려 묻히고 사라져 가는 선현들이 추어 온 교방가무연 춤가락이 발현되지 못한 점을 못내 아쉬워한다. 박경랑은 50여년을 전통춤과 함께 살아 온 2세대 중심 춤꾼으로 깊숙이 자리매김한 본능적인 끼가 확연히 자리 잡힌 풀뿌리 춤꾼이다. 명인의 등용문인 전주대사습 무용부 장원, 서울전통공연예술대회 대통령상, 김수악류 진주교방굿거리 1기 이수자로서 영남 교방청춤하면 바로 박경랑을 전무후무한 독보적으로 떠올릴 만하다. 반듯한 춤 태와 완성도 높은 내공으로 무대 적응을 철저하게 표현해 냄으로서 자신만의 작품을 극대화 시키는 곰삭은 멋과 한을 표현해 낸다. 이로 하여 원형을 재현하는 신명난 춤 세계를 구현 하므로서 진한 감동과 여운을 남기는 춤꾼이다. 문둥춤을 보노라면 공옥진여사의 짠한 마음은 누구나 같은 마음 일찐데.... 김진옥선생은 열정과 진취적인 무용지도자로 단아한 전통미를 갖춘 춤꾼이다. 일찍이 스페인 무용의 1세대인 주리선생으로부터 인체의 기초를 다진 다부진 몸매로 우리 춤 몰두를 위해 마산 출신 김해랑, 최현, 정민에 이은 2세대 명맥을 이어 온 성실하고 폭 넓은 활발한 춤꾼이다. 우리 춤이 시대에 가려진 7,80년대, 이매방과 정민이 우정이 두터운 사이였던 시기, 무용가 양정화는 두 분의 선생을 가까이 모시면서 일본 오사카를 오가며 묻혀져 가는 전통의 맥을 계승하고자 힘든 시기를 겪은 무용계에 깊이 점철된 무용가 분이셨다. 김진옥은 1.5세대인 양정화, 정재만에 이어, 이 시기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신념과 열정으로 정민류의 교방무, 교방타고무, 교방검무 등의 기법을 오롯이 이어 가는 역정에 사로잡힌 춤꾼이다. 김진옥은 정민류교방춤보존회을 발족, 전승에 혼신을 바쳐 오늘에 이르러 수많은 제자 양성과 다양한 수상 경험을 이루는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갖춘 괄목할 현실 전통무용가로 자리를 잡았다. 박병천의 진도북춤, 벽사 춤에 대한 열의와 방송매체와 여러 대학에서 교육과목으로 몫을 다지면서 전국 규모의 전수활동으로 우리 춤 본연의 역할을 담담히 수행하고 있다. 멋과 흥을 품어 내며 풍류색색의 가락은 휘엉청 감아내는 치마폭에 여실히 자아냄을 찾아 볼 뜻있는 춤판이다. 방방곡곡 춤꾼이어라... 정명자선생은 5세부터 쉼 없이 춤 공력에 전념으로 살아 온 한마디로 팔방 춤색이 역력한 매력 있고 다부진 춤꾼이다. 1983년 정명숙 명무 문하에 입문, 1985년 전사습 명인, 황재기 명인, 김숙자 명무에 이어, 1980년대 후반, 차례로 이동안, 박병천, 김진걸, 이매방, 김수악, 권명화 명무에게 전통춤 사사에 빠짐없이 수학한 이수자로 검증된 무용가이다. 제1회 발표회가 1986년 바탕골소극장에서의 인연과 문예회관(현, 아르코)에서 제2회 개인공연, 42회에 걸친 제작발표회, 전통을 바탕으로 한, 익히고 삭힌 민족의 혼을 담은 대형 무용극, 뮤지컬"이육사, 이순신의 바다, 의병장 곽재우, 문무대왕, 선덕여왕, 북소리, 농자천하지대본, 화랑의 혼”, 여성국극 "혜경궁 홍씨, 햇님 달님, 황진이” 창작화 작업에 초청되는 등,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위대한 업적을 다룬 시대적 표상 작품을 올린 바 있다. 미래 지향적인 춤꾼 정명자선생은 새롭고도 역량 있는 작업으로 오는 12월 대한민국 국제뮤지컬페스티발 초청작으로 ‘김유신장군’에 몰입 중에 있다. 이는 내재된 무한한 작품세계를 구현하고자 하는 예술가로서 묵혀 둔 본능적인 감각이 발현하는 소신 있고 범상치 않은 작업을 마땅히 해낼 분이라 본다. 소리와 악기에도 소질이 많은 정명자선생의 또 다른 멀티 콘서트도 기대해 볼만한대 언제가 될지 궁금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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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고무용가상'에 박명숙 경희대 명예교수대한민국 최고무용가상'에 박명숙 경희대 명예교수가 선정됐다.한국무용협회는 '대한민국 최고무용가상'은 박 명예교수가 받는다고 25일 밝혔다. 박 교수는 '한국 현대무용 1세대' 무용가이자 '최연소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박명숙댄스시어터 예술총감독으로 국내 현대무용 역사와 함께하며 40년 넘게 후학을 양성하고 300여편 이상의 작품을 안무한 선구자다.'Creative Artist'는 탁월한 창의성으로 호평받은 무용가를 선정하는 상으로 김삼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장이 받는다. 김 원장은 30년 전부터 예술 장르간 결합 및 무용의 장르적 경계를 넘어 다양한 창작기법을 시도했고, 한예종 무용원 창작과에 재직하며 세계적인 수준의 안무가를 배출하는 무용전문 교육의 기틀을 마련했다.평생 춤추는 것이 인생에 전부였던 김백봉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김백봉상'은 열정과 패기가 넘치는 젊은 무용수에게 주어지는 상으로 윤나라(NARaRT 대표)와 권미정(2021 젊은안무자창작공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수상)에게 돌아갔다.특별상은 코로나19 시기에도 무용 부문에 많은 지원을 한 오현정 서울시의원과 이성일 경우이앤씨 대표이사가 받는다.이 밖에 한국무용협회 부설기관인 춤문화유산콘텐츠발전위원회에서는 한순서 선생의 '오북'을 명작무 제18호로, 정재만 선생의 '청풍명월'을 명작무 제19호로 지정했다. 명작무는 전통무용의 얼과 맥을 보존하기 위해 지난 1992년부터 고(故) 김진걸 선생의 '산조'와 김백봉 선생의 '부채춤'이 제1호와 제2호로 지정되기 시작하면서 현재 제17호까지 지정됐다. 한편 한국무용협회는 '2021 대한민국 무용대상&무용인의 밤'을 오는 12월10일 오후 7시에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개최한다.대한민국 무용대상 결선도 이날 행사에서 치러진다. 본선을 통해 선정된 상위 두 단체는 박시종 무용단의 '춤타올라'와 안귀호 춤 프로젝트의 '하루:레종데트르(raison d’etre)'이다. 두 단체는 대통령상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의 향방을 가리는 경연을 펼친다. 오프라인 행사 외에 유튜브 한국무용협회 채널을 통해 생중계로도 송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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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전국국악대전 대통령상 이미화씨 (수상자명단)*수정무제 문서 제 11회 전국국악대전 대통령상 이미화씨 (수상자명단) 지난 25~26일,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주최·주관으로 제11회 전국국악대전이 종로구민회관에서 열렸다. 올해로 11번째를 맞이하는 ‘전국국악대전’은 국악의 올바른 전승과 체계적 계승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수행할 우수 국악인의 선발 및 등용문으로 실시되고 있으며 종합대상에게는 대통령상이 주어지는 특장대회로 참가부문으로는 가야금병창, 고법, 기악, 농악, 전통무용, 판소리가 있다. 종합대상에게는 대통령상과 함께 300만원의 상금, 대상은 각 부문별로 1명이 선발되어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과 함께 50만원이 주어진다. 부문별 대상은 무용부문 이미화 씨, 기악부문 김미량 씨, 고법부문 권은경 씨, 판소리부문 송길화씨, 가야금병창부문 김미림 씨, 농악부문 신우근 씨가 각각 받았다. 이날 종합부문 대상으로 영예의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미화 씨에게 수상 소감을 묻자. “먼저 우리 국악인의 대표 기관에서 주최하는 제 11회 전국 국악 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공정한 심사를 해 주신 심사위원님과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저에게 소고춤을 전수해 주신 남편 최종실 교수께 감사드립니다.”며 수상소감을 전했다. 최종실 류 소고춤으로 수상하게 된 것은 이미화 씨에게 큰 의미가 있다. 한민족의 영혼과 사상을 담고 있는 미학의 춤으로써 오늘날 수 많은 춤꾼들이 그 맥을 이어 전승하고 있는 최종실 류 소고춤은 그의 시아버님이신 최재명(1905~1978)으로부터 남편인 최종실 교수가 전수받아 자신에게까지 전수된 춤이기 때문이다. 또한 최종실 교수는 의 제3회 대상수상자로써 부부가 같은 대회에서 영예로운 수상을 하게 되어 뜻깊은 순간이 되었을 것이다. 이미화 씨는 1954년 서울 혜화동에서 출생하여 혜화 초등학교, 금란여중, 금란여고, 한양대학교 무용과를 졸업하였으며, 1961년 충무로에 있는 새들 아동극단에 입단 하여 6년간 안성기, 전영선, 전상철 등 아역 배우들과 활동하며 예술세계에 입문했다. 한국무용 입문은 1964년 초등학교 4학년 때 삼선교에 있는 김진걸 무용학원에 입학하여 김진걸 선생께 한국무용을 사사받으면서 춤꾼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초.중.고 시절, 수많은 전국경연대회에서 입상하였으며 미술에도 소질이 있어 각종 그림대회에도 수상 경력이 있다. 그 뒤, 한양대학교 무용과에 입학하여 김옥진, 김복희, 김화숙 교수께 사사 받았다. 이 후 1977년, 서울시립무용단에 입단하여 수많은 공연과 국가행사에 출연했으며, 미국 프랑스 일본 홍콩 인도네시아 등 많은 해외 공연을 하였다. 1982년에는 사물놀이 창시자 중 한명인 최종실 교수와 결혼하였고, 1988년에는 박동진 명창과 사물놀이 원년 멤버들과 미국 5개 도시 순회 공연을 하였다. 그 후 1990년, 한민족예술단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무용감독을 역임했으며, 현재 여성타악단 쟁이 단장, 최종실 류 소고춤 보존회 지도위원, 중앙대학교 전통예술학부 외례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요즘 우리 전통무용이 침체기를 걷고 있을 때 받은 뜻 깊은 상이므로 앞으로 더욱 더 우리의 전통춤을 계승 발전시키는데 앞장 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최종실 류 소고춤‘은 중요무형문화재 삼천포농악의 명인 이셨던 최종실 교수의 아버지 최재명 소고놀이를 최종실 교수가 독특한 춤사위와 가락으로 짜임새 있게 재 구성하여 무대화시킨 춤으로 경쾌하고 절도있게 몰아치는 춤사위와 굿거리, 자진모리, 동살풀이,휘모리 등 다양한 가락에 맞추어 소고를 두드리면서 활동적인 발디딤과 대삼, 소삼 몸짓으로 어우러져 신명을 풀어내는 춤이다. 채상소고이지만 고깔소고만큼이나 춤사위가 뛰어나며 특히 오금이 특징이다. 김다슬 기자 제11회 전국국악대전 수상자 명단 부 문 구 분 수 상 내 용 수상자 무용부문 종합대상 대통령상 이 미 화 기악부문 대 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김 미 량 고법부문 대 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권 은 경 판소리부문 대 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송 길 화 가야금병창부문 대 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김 미 림 농악부문 대 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신 우 근 (사)한국국악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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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문화예술발전 『문화훈장』문화체육관광부는 2008년 문화예술발전 유공자에 대한『문화훈장』서훈자와 『제40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대통령상)』및『2008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장관상)』수상자 등을 선정, 발표하였다. 올해 서훈대상자와 수상자는 전국의 문화예술단체, 지방자치단체, 대학 및 일반국민으로부터 후보자 추천을 받아, 각 분야별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의 심의, 선정 및 정부 공적심사위원회를 거쳐 최종 확정하였다. 문화훈장 서훈대상자는 총 25명으로, 작고시인 故 김윤식(예명: 김영랑)에게는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며,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오세영,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최종태,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박광진, 서양화가 한백유(예명: 한묵) 등 4명에게 은관문화훈장, 국립국악원 원로사범 정재국, 前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초빙교수 故 김형표(예명 : 김진걸), 한국전쟁 중 문화재를 보호한 前 공주경찰서장 故 차일혁, 무대의상 디자이너 윌라 김, 前 한국문화원연합회장 권용태, 앙드레김 아뜨리에 대표 김봉남(예명: 앙드레 김), 前 이화여대 미술대학 교수 故 이종수,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이만방, 등 8명에게 보관문화훈장, 서강대학교 영문과 명예교수 안선재, 안동문화원장 김준식, (사)한국화랑협회 원로회원 박주환, 망운암 주지 박만식(법명: 성각),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김윤철, 만화가 김산호 등 6명에게 옥관문화훈장, 안산문화예술의전당 관장 구자흥, 前 서귀포문화원장 김계담, 청주문화원 고문 박영수, (주)디자인파크커뮤니케이션즈 대표 김현, (주)비오에프 배우 배용준, 한국영상프로덕션 대표 박공서 등 6명에게 화관문화훈장을 각각 수여한다. 한편, 올해로 40회째가 되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자(단체)는 문화부문에 (주)PMC프로덕션 대표 송승환, 문학부문에 시인 홍성란, 미술부문에 경원대학교 교수 서기흔, 음악부문에 부천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예술감독 임헌정, 연극·무용부문에 극단 물리 대표 한태숙, 대중예술부문에 부천만화정보센터이며 대통령 상장과 부상으로 상금 1천만원을 각각 수여한다. 아울러 장래가 촉망되는 20~30대의 젊은 예술가들을 선정하여 ‘93년부터 시상해오고 있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의 수상자는 전통예술부문에 국악인 조주선, 문학부문에 소설가 김애란, 미술부문에 조각가 정연두, 디자인부문에 보석 디자이너 박은선, 음악부문에 작곡가 최명훈, 연극부문에 연출가 장유정, 무용부문에 무용가 임혜경, 영화부문에 영화감독 민규동, 대중예술부문에 가수 장나라 등 9명이며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상패와 부상으로 상금 5백만원을 각각 수여한다. 금년에는 문화예술분야에 근무하는 공무원의 사기진작과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문화예술발전에 크게 기여한 유공 공무원을 발굴하여 함께 포상한다. 수상자는 순천시 기적의도서관 허순영 관장, 종로구청 재무과 이미경, 태백시 문화시설관리사업소 이수원, 구례군청 문화관광과 박인선, 영월군청 도시개발과 안성자, 울산광역시 문화예술과 신형석 등 6명이며,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이 수여된다. 서훈 및 시상은 10월 18일(토) 오후 4시 청주 예술의전당에서 개최되는 ‘2008년 문화의 날 기념식’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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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춤 백년의 유산주최 The춤연구원 김진걸류산초춤보존회주관 공연기획 MCT후원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재청국립무형유산원 (사)한국전통춤협회 The춤연구원후원회 관람연령 취학아동이상 관람가티켓 전석 30,000원예매 인터파크 1544-1577문의 02-2263-4680 www.mctdance.co.kr STAFF예술감독 최원선연출 김숙자음악연주 유인상해설 이병옥의상디자인 신근철조명감독 주영석영상・사진기록 김정환홍보진행 김세련 방석주 김지요 CAST김숙자 안춘자 김광숙 노혜경 이순옥 최예나 윤예지 박청조 주연희 김연정 최원선 기획의도 한국의 대표적인 춤유산들과 그 우수레퍼토리를 한 무대에 올리는 자리를 마련하여 한국무용의 역사성을 재조명하고 올곧게 후대에 이어가고자 하는 이번 공연은 한국 춤문화의 전통성과 정통성의 맥을 잇고 아울러 그 혼이 담긴 제자들의 발전된 무대를 통해, 옛것과 현재가 공존하는 시대에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되짚어 주는 무대가 될 것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특히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가장 많이 사랑을 받는 대표적 전통춤, 승무와 살풀이춤 외에 김진걸류 산조춤, 한영숙류 태평무, 박병천류 진도북춤 등의 한국춤의 고유한 정서와 독특한 멋을 전하는 레퍼토리들을 함께 엮어 보다 다양한 우리 춤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해설을 곁들여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며 공연인구 저변확대를 꾀하고자 한다. ‘The(더)춤연구원’은 한국문화의 ‘춤’을 핵심으로 함께 ‘더’ 배우고 나누고 연구하는 센터로서, 한국문화를 대표하는 전통 무용 작품들을 올곧게 계승하고 후대로 이어가고, 그 영역을 현시대까지 확장하여 춤에 대한 심도 깊은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특히 본 원에서는 산조춤을 비롯한 한국 전통춤의 우수 레퍼토리의 보급과 현시대와의 소통을 위한 연구에 힘쓰고자하며 그 일환으로 이번 중견 무용예술인들의 기획공연을 마련하고 관객들과 직접 소통하고자 한다. PROGRAM ※ 해설_이병옥(전통춤평론가, 용인대학교 명예교수) 1. 태평무 (한영숙류) / 출연_노혜경 이순옥 윤예지 박청조 한송이태평무는 나라와 민족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며 추었던 고귀한 스타일의 춤이다. 특히 한국 굿문화의 독특한 리듬과 어우러져 보여주는 빠른 발놀음들은 이춤의 백미라 하겠다. 이 춤은 1930년대에 한성준옹에 의해 만들어져 한영숙과 강선영을 통해 이어져 내려와 1989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 92호로 지정되었다. 주로 추어지는 춤의 종류는 한영숙류과 강선영류 두가지로 구분되어지고 있으며 이번 무대는 단아한 한영숙류의 춤을 선보인다. 2. 진주교방굿거리춤 (경남도무형문화재 제21호)/ 출연_최예나1997년 경남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된 진주교방굿거리춤은 한국춤의 네가지 요소인 한. 흥. 멋. 태를 고루 갖추고 있다. 차분하면서 끈끈하고 섬세하면서 애절한 무태로서 정.중.동 의 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어 무아지경으로 이르게 하는 매력을 갖추고 있다. 또한 자진모리장단으로 넘어가면서 치마를 둘러메고 소고춤을 추게 되면 그 경쾌함과 아기자기함이 보는 이로 하여금 어깨춤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이 소고춤은 신명은 있으나 요란스럽지 않고 흥에 겨워 빠르게 움직이나 그 속에 멋과 여유로움이 있는 춤이다. 3. 입춤(안춘자류)/ 출연 안춘자외 2명소도구 없이 맨손으로 추는 것이 특색인 입춤은 기교가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춤의 우아함과 요염함을 곡선과 직선의 미로 표현해내는 그 독특한 버선발의 디딤새는 이 춤의 특징이라 하겠다. 민속성이 강한 이 춤은 흥과 멋 그리고 자연의 곡선미와 즉흥성과 신명의 몸짓으로 정박과 엇박을 타고 넘나들면서 맺고 풀고, 또 풀고 맺는다. “얼~씨구 좋다” 하는 입타령과 손장단 그리고 발장단으로 관객과 함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며 흥으로 춤과 일체감을 더하는 작품이다. 4. 살풀이춤 (국가무형문화재 제97호) / 출연_노혜경단순한 호흡을 통해 추며 복잡하지 않고 감정을 억제시킨 정갈한 춤이다. ‘정중동’, ‘동중정’의 자유로운 무작으로 되어있어 예술적이고, 종교적이다. 특히 이매방류 살풀이춤은 아기자기고 유연하면서도 내적 강인함이 느껴지는 균형을 추구하는 춤이다. 5. 내 마음의 흐름 (명무지정, 산조춤) 안무 김진걸(1992년 명무지정) / 출연_최원선신무용의 주자이자 창작화에 몰두한 김진걸 선생이 가야금산조에 춤사위를 실어 산조춤의 틀을 만들었고, 그의 춤 인생철학을 이 산조춤에 실어 <내 마음의 흐름>이라는 작품으로 완성하였다. 이 작품 속에는 그만의 독특한 춤 언어가 내재되어 있다. 끊고, 맺고, 어르고, 풀고 또 시원시원한 직선의 솔직함과 다정다감한 그의 성품이 돋보인다. 그리고 인생의 생로병사를 담아 득도에 들게 되는 춤, 김진걸 선생의 인생을 담은 춤이다. 6. 승무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출연_김숙자 외 주연희 김연정한국춤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승무는 한국 춤사위를 총 집대성해 놓은 춤으로 질량의 확대가 크다. 아름다운 인간 내면철학의 경지로 승화된 모습을 담고 있으며 천, 지, 인 삼재사상이 내재된 춤으로 담백하고 우아하며 절제된 멋과 함께 긴 소매의 장삼을 이용한 공간구성미가 돋보인다. 7. 예기 수건춤 (박금슬류) / 출연_김광숙옛 기녀들은 몸과 마음을 장단 흐름과 음률 소리에 실어 험두험신으로 예를 갖추고, 저고리 소매나 가슴에 간직했던 손수건을 뽑아 들고 즉흥적으로 멋진 흥에 취해 춤을 추었다. 보는 사람들과 흥을 교감하기 위해, 춤추다가 떨어뜨린 손수건을 조심스레 입으로 끌어 올릴 때, 여자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매혹적인 춤이다. 예기 수건 춤은 민간인도 오래전부터 손수건은 소지 하여 긴 수건 춤보다 먼저 추어진 춤이다. 8. 진도북춤 군무 (박병천류) 재구성_최원선 / 출연_최원선 이순옥 윤예지 박청조 한송이화려한 북장단과 춤사위를 기본으로 두 손에 북채를 들고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즉흥성과 신명을 바탕으로 춤을 이끌어 나간다. 강렬한 북 가락과 함께 다양하고 유연한 장구가락을 동시에 갖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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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은의 춤 "바람" 8. 2● 일 시 : 2009-08-02(일) 오후 5:00 ~ 6:30 ● 장 소 : 국립국악원 우면당 ● 주 최 : 이영은 ● 관람연령 : 초등학생이상 관람가능 ● 관람시간 : 90분 ● 가 격 : 무료 ● 문 의 : 011-796-8718 ● 공연 내용 1. 태평무 - 강선영류(이영은) 2. 장고춤(이영은) 3. 산조춤 - 김진걸류(이영은) 3. 즉흥시나위 - 최현류(이영은) 4. 한오백년 변주곡 - 가야금25현(찬조) 5.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들 - 해금(찬조) 6. 간(間) - 피리(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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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선의 『歲寒然後(세한연후)』『歲寒然後(세한연후)』 제 1 부 세한행(歲寒行) program 「 푸 살 」 「 부적 놀이 」 「 칠 채 」 「 도살풀이 」 「 승천무 」 「 살풀이 」 「 대감놀이 」 제 2 부 세한연후(歲寒然後) 「 승 무 」 「 기원무 」 「 소고춤 」 「 삼고무 」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와 97호 살풀이춤 이수자 김묘선(金昴善)은 한국에서 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한 재일 한국전통무용가이다. 그녀는 1957년 대구 신암동에서 교육공무원인 부모님 밑에서 2남 4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 어느 날 하교하는 길, 대구역 KG홀에 걸려있는 “한국고전무용발표회”의 현수막을 보고 찾아 들어간 그 곳에서 그날 저녁 늦도록 공연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아 바로 학교 무용반에 들어가 무용과 인연을 맺었다. 교육공무원인 부친으로 인해 밥 먹듯이 전학을 다녀야 했고 그로 인해 학교 동창이 거의 없다고 푸념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늘 무용 배우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어린시절 그녀에게도 당시 내로라하는 어린 재주꾼들이 활동하던 리틀엔젤스에 입단하라는 제의도 있었지만 집안의 장녀라는 것과 지방에 귀거하는 어려운 조건 때문에 가슴속에 묻고 살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효성여대에 입학한 후 그녀는 무용에 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서울로 발길을 돌렸다. 방 한 칸 얻어서 생활하면서 그동안 변변하게 내세울만한 스승이 없었던 그녀에게 1978년 드디어 그녀에게 인생의 정신적 지주인 심소 김천흥 선생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궁중정재의 길을 밟게 되었다. 심소 선생과 이흥구 선생과의 인연이었다. 심소 선생은 얼마 후 그녀의 춤새를 보고 그녀가 이매방 선생 문하로 들어갈 것을 권유한다. 1982년 2년 후에 열릴 “이매방 춤 인생 50주년” 준비로 한창인 이매방 선생을 찾았을 때 선생은 어떻게 해서 무용을 하게 되었냐는 문답에서 그녀가 어린시절 그토록 감동받았던 KG홀의 “한국고전무용발표회”가 바로 이매방 선생이 출연한 무대였다는 말에 이매방 선생과의 만남은 그녀에게 일생일대의 행운이며 천명이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리고 2년 후인 1984년 그녀의 평생의 스승과 함께 무대에 오른다. 그녀는 호남의 토속적이며 흙냄새가 나는 이매방 선생의 춤에 감동받고 반해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것이 2번째 인연이다. 그녀에게 세 번째 인연은 남편과의 만남이다. 그녀의 남편은 특이하게도 일본의 성직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도쿠시마현의 다이니치사 주지인 오구리 고헤이 씨와 만남이다. 당시 그녀는 정신적 메나리즘에 빠져 있을 때였다. 장녀인 그녀는 5명의 동생들을 모두 결혼시키고 부친까지 재혼시켜 새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할 때였다. 도쿠시마현에 그녀가 이끌고 있는 발림무용단을 데리고 공연을 갔을 때 그녀의 평생 반려자를 만나게 된다. 이미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일본에서 귀인을 만날 것을 암시해 주어 좋은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 예감은 했지만, 남편을 만나게 될 줄을 미처 몰랐다고 한다. 당시 도쿠시마 공연의 스폰서였던 그녀의 남편은 김묘선의 승무에 반해 일본에서 활동영역을 넓혀주고 만남을 지속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1997년 그녀에게 청혼해 승낙을 얻어내고 결혼했다. 그녀가 한국에서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한 것은 남편의 외조가 있었기에 가능하였고, 그리고 춤의 깊이를 알게 해준 데에 일조를 했다. 김묘선, 춤이란 그녀의 인생이고 인연이라고 한다. 서울로 올라와 그녀는 추계예술대학교 국악과에 입학하여 악가무(樂歌舞)모두를 겸비한 종합예술인의 소양을 갖추고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진정한 춤꾼으로 태어나기 위해 연세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하였다. 그리고 1982년에는 인천에 한월무용학원을 개설하여 후학양성에도 크게 정진하였다. 그리고 한월무용학원 출신들로 1988년 현재 발림무용단을 창단하여 활동하면서 인천문화예술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1989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이수자로 지정받으면서 춤을 시작한 20년 만에 큰 전환기를 맞고 비로소 한국전통춤의 세계화를 목표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Pepper Dine에서 공부하는 도중에 를 설립하고 LA 월셔이벨극장, 반스돌겔러리극장, LA 한국문화원, 뉴욕 카네기홀 등등의 극장에서 수차례 공연을 하면서 우리의 전통춤을 미국에 알리는데 누구보다도 앞장섰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초청공연, UC샌디에고 대학에서 한국무용 소개, 미주 한인방송국에서의 무용강습 등 그는 한국전통 춤 알리기를 위해 크고 작은 무대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그리고 1995년 11월 그녀는 드디어 영예의 대통령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명무의 꿈을 구체화시켰다. 그리고 최현, 김진걸 선생에게 창작무를 사사했고, 현재는 중요무형문화재 태평무 보유자인 강선영 명무으로부터 태평무를 공부하고 있다. 김묘선 씨는 국내외 크고 작은 100여 회의 공연을 통해 한국전통무용계에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전환시키고, 다섯 번에 걸친 개인 발표회에서 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인 차범석 씨는 “균형 잡힌 체구는 선천적 혜택이고, 그 절제와 우아함과 유연함은 한국 춤의 수행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풍요와 안락한 생활에서 나태하며 오만해지지 않았으며, 고난을 극복하고 풍요와 안락 속에서 춤 예술의 외길을 조심스럽게 다져 오기까지는 한편의 인간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김묘선의 춤은 곡선의 단아한 멋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그녀의 일본 공연에서는 공연장이 꽉 메워 이국에서의 그녀의 인기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러나 김묘선, 그녀는 자신의 춤에는 독특한 색깔이 없다고 한다. 그것은 그녀의 스승의 춤을 그대로 닮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스승이 계시기 때문에 전통 춤에서 내 색깔이나 특징을 담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스승인 이매방 선생의 춤을 세계 곳곳에 알려 심는 것이 그녀의 꿈이라고 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춤은 인생이며 숙명이라고 한다. 거짓으로 꾸며내는 것이 아닌 자기의 마음을 담아 그려내는 인생이라고... 송미향 기자 www.kukak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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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춤의 맥과 혼을 이어온 춤꾼"이명자가 만든 전통명무춤판(2003년 9월 26일)은 무용계에 많은 관심과 호응 속에 성대한 막을 올렸고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객석은 만원을 이루어 뒤편에 입석으로 관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면 최근 객석 채우기도 힘든 공연예술계에 이처럼 관객들이 몰릴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출연하는 명무자들이 현재 가장 비중있는 장년층의 전통명무자들을 초청했기 때문이며, 이명자가 평소 인간관계를 잘 맺어 논결과가 아닌가 싶다. 아직도 원로 전통무용가들도 여럿 생존해 계시며 지금도 그 명성을 가지고 공연에 임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이제는 80세 전후의 고령이어서 그 유명세와 명성으로 무대에 오르는 것이지 신체적으로나 기량 면에서 최고조를 이미 넘긴 분들이다. 그러나 이번 무대에 오른 이현자, 조흥동, 채상묵, 김정녀, 김근희, 이명자는 60세 전후의 장년층으로 연륜과 기량이 최고조로 무르익은 세대들이다. 그리고 제각기 자기 개성이 뚜렷한 전통춤 레파토리를 가지고 있어 다양한 명무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기 때문이었다. 우리 무용계는 특이한 세대적 특징이 있다. 근대무용의 선구자들이었던 한성준, 최승희, 조택원 등이 1세대(100세 전후)들이었다면 그들의 제자세대들인 지금의 원로세대인 한영숙(작고), 강선영, 이매방, 김백봉, 김진걸, 송범, 김문숙, 최현(작고), 임성남(작고), 정병호 등 모두 80세 전후 연령층이 몰려있다. 그러니까 90세 전후연령 층의 중간세대 김천흥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 마찬가지로 무용계 3세대는 낀세대인 70세 전후연령을 건너 뛰어 60세 전후 연령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바로 이번 ‘우리 춤의 맥과 혼을 이어온 춤꾼’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 세대들까지는 개인적 사제전수(師弟傳授)과정으로 맥을 이어 왔으나 그 다음세대부터는 사회가 다양화되고 특히 대학에 무용학과가 개설된 1963년 이화여대 무용학과를 필두로 1970년대 이후는 무용학과가 많이 생겨 대학교육과정을 통해 배출된 무용가들이기 때문에 매년 배출되는 관계로 50세 이하인 4세대 부터는 연령층이 몰려있지 않게 된 것이다. 각설하고 이번 무대에 올려진 전통 명무자들은 제각기 전통춤의 기량을 십분발휘 하였다. 첫 작품은 이명자(중요무형문화재 92호 태평무 전수조교)의 ‘즉흥무’였는데, 말 그대로 어떤 양식에 구애됨이 없이 춤꾼이 분위기에 따라 즉흥적으로 추는 춤이다. 이 즉흥무는 강선영류의 즉흥무로 한 손에 수건을 들고 추는 ‘수건춤’이라 할 수 있다. 수건을 들면 모두 살풀이춤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무복과 춤의 정서가 다르다. 즉흥무는 유색무복이며 수건도 짧고 예술적 감성과 춤끼로 추나, 살풀이춤은 소복계통의 무복에 수건도 길고 한을 푸는 제살성(除煞性)을 지닌 춤이다. 역시 이명자의 즉흥무는 이명자의 성품처럼 소녀같은 고운 자태의 맵시를 잘 살렸다. 김근희의 ‘교방입춤’은 기녀복에 허리띠를 동여매고 합죽선을 들고 요염하게 추는 기녀 춤이라 할 수 있는데 김근희의 끼춤와 눈웃음 춤으로 시공을 뛰어넘어 옛 선비들을 사로잡았던 멋스러움을 보여주었다. 채상묵의 ‘승무’는 이매방류(중요무형문화재 27호)로 깔끔한 춤사위로 본인의 인품만큼이나 담백하고 고운 선율의 장삼춤 맵시를 살렸다. 그런데 승무 유파를 논할 때 흔히 호남류(이매방류)와 경기류(또는 중부류- 한영숙류)로 구분하여 분류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들의 계보는 스승들이 그 지역 출신인 것은 맞으나 오늘날 추고있는 승무는 지역성을 뚜렷하게 구별할 수 없이 범한국적인 전통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즉 음악도 호남시나위를 쓰지않고 둘 다같이 서울경기시나위를 쓰고 있으며, 춤사위도 지역적 특징은 구별이 않된다. 구별되는 것이 있다면 예인(藝人)의 신분적 차이로 나타나는 춤의 성격은 확연히 구별된다. 즉 이매방 승무는 기방계통(기방에서 성장)의 ‘기방(妓房)승무’ 춤사위 특징(여성적 자태미, 모음사위 등)이 나타나며, 한영숙 승무는 재인계통(한성준)의 ‘재인(才人)승무’ 춤사위가 (담백미, 남성적 자태미 등) 양쪽 춤의 특징으로 남아있다. 따라서 승무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지역성은 이미 상실하였기 때문에, 예인의 출신성향에 따른 구별법으로 ‘기방(계)승무’와 ‘재인(계)승무’로 분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현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예능보유자 후보이나 오늘만은 태평무를 추지 않고 제자이자 후배인 이명자에게 양보하는 미덕을 발휘하여 ‘산조’를 추었다. 이현자의 ‘산조’는 강선영류로 고희(古稀)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몸놀림과 춤이 흐트러지지 않는 원숙하고 노련한 기량으로 거문고 산조에 맞춰 엇박의 묘미를 살렸다. ‘검무’는 이명자무용단원들의 무대로 경기검무이다. 검무는 지방관찰사(진주, 해주, 평양, 전주)가 있는 지역의 지방관기들에 의해 전승되던 것으로 궁중무용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어 전국 검무들이 유사점과 상이점을 동시에 가지고 전승되고 있다. 그중 경기검무는 한성준에서 그 맥이 강선영으로 이어져오고 있으며 칼날이 한쪽으로만 끄덕이는 검무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조흥동의 ‘한량무’는 옛 선비 춤이라 할 수 있는데, 원래는 여러 배역(주모, 먹중, 색시, 한량)이 군무로 추는 극 춤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한량 춤만을 부각시켜 ‘독무 한량무’를 주로 추고 있어 젊은 세대들은 한량무가 독무로만 알고 있는 이가 많은데, 이것은 원래 ‘군무 한량무’였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조흥동의 한량 무는 갓을 쓴 선비의 고고한 자태와 품위를 도포자락 휘날리며 합죽선을 놀리면서 인생무상을 그린 작품이다. 한량 무에 한해서는 현재 조흥동이 최고의 명무자임을 보여준 무대였다. 김정녀(중요무형문화재 97호 전수조교)의 ‘살풀이춤’은 역시 이매방류인데 김정녀의 자신이 살아온 생애의 한을 정말로 춤에 담아 정중동의 미감으로 풀어내는 무대였다. 마지막 이명자의 태평무는 본인이 평생 몸 바쳐 전수조교로 활동하고 있는 강선영 태평무(중요무형문화재 92호)로 마무리 지었다. 태평무는 승무나 살풀이춤과는 사뭇 정서가 다르고 화려하다. 경기도당굿 도살풀이장단에 화려한 궁중복인 원삼활옷에 경쾌한 민속춤사위와 발놀림사위가 어우러져 한국전통 춤의 다양한 장르가 어우러진 앙상블을 이룬다. 결국 이번무대는 다양한 우리 춤의 맥과 혼을 이어온 장년춤꾼들이 춤으로 무용의 역사를 써내려간 무대 같은 뜻 깊은 공연이었다. 용인대 무용학과 교수 경기도 문화재 위원 이 병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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